난 그 노랠 다시 부르며 마지막 길을 걸어갔어요
(신 32:1-6, 막 16:14-18, 딤후 4:5-8)
• 내려놓으면서 아름다워지는
어디에 눈길을 두어도 아름다운 계절을 살고 있습니다. 가을은 산도, 들판도, 나무도, 모두 나의 색깔을 내려놓고 하늘의 색깔로 물들어가기 때문에 그리 아름다운 모양입니다. 물들어가는 나무를 보면서 우린 단풍 구경과 나들이 생각하고, 카메라에 그 아름다운 정경을 담기에 분주하지만 한 시인은 물들어가는 가을 나무의 ‘절박한 심정’을 그렇게 알려줍니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도종환, 단풍 드는 날)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답니다. “방하착! 내려놓으라!” 그 하늘 명령 앞에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물이 든답니다.
내려놓으라! 오늘 신명기의 말씀에서 인생 마지막 기간을 보내고 있는 한 사람도 그런 명령 앞에 서 있습니다. 참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꿈에도 그리던 그 목적지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거기에서, 하필이면 그에게, 너는 거기 못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는데요... 하나님께서 나한테 그러시면 안되지요.’ 지난 40년 동안 이날을 바라보며 죽을 고생을 하며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림처럼 펼쳐지는 가나안 땅이 내려다보이는 느보산에서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불평, 원망, 분노로 물들 수밖에 없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순종합니다. 아니 그의 인생을 더 아름답게 말씀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내 생애의 마지막 날들, 가고 싶은 곳도 가보고,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도 시간을 보내고... 그렇게 보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 그 공동체(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에 온전히 헌신합니다. 온 교회를 소집하여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저녁에 한 번... 세 번의 집회를 열었던 것 같습니다. 신명기는 이때 증거되었던 세 편의 설교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 마지막 노래를 부르다
그렇게 두 번의 설교를 마쳤습니다. 이제 마지막 설교를 앞두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십니다.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라...” 갑작스러운 죽음 소식 듣고 당황하는데 노래는 무슨 노래입니까? 죽음 앞에서 무슨 노래할 분위기였겠습니까? 그런데 그 명령에도 순종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마지막 설교를 마친 후 그는 지금 ‘마지막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신명기 말씀은 죽음 앞에 서 있던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만든 노래, 이 땅에서 부른 마지막 노래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하늘아, 내가 말할테니 귀를 기울여라/ 땅아, 내가 입을 열테니 주목하여라/ 나의 가르침은 부드러운 비처럼 내리고/ 나의 말은 아침 이슬처럼 맺히나니/ 새싹 위에 내리는 가랑비/ 정원에 내리는 봄비 같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니/ 우리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응답하여라/ 그분은 반석, 그분의 일은 완전하고/ 그분의 길은 공평하고 정의롭다/ 너희가 의지할 하나님은 한결같이 올곧은 하나님이시다.”(신 32:1-4, 새번역)
그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을 앞장, 31장 말씀은 그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회막으로 나아오라는 명령을 받고 회막에 섰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마지막 명령을 주셨습니다. “너는 네 조상과 함께 잠들 것이다. 그러나 이 백성은, 들어가서 살게 될 그 땅의 이방 신들과 더불어 음란한 짓을 할 것이다. 그들은 나를 버리고, 나와 세운 그 언약을 깨뜨릴 것이다.”(31:16, 새번역). 그들의 변질을 예고합니다. 그들의 타락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마지막 부탁이 나옵니다. “이제 이 노래를 적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 부르게 하여라. 이 노래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내가 무엇을 가르쳤는지를 증언할 것이다.”(31:19, 새번역).
신명기의 후반부를 보게 되면 이 노래에 대한 언급이 계속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1장 20-21절,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뒤에, 그들이, 살이 찌도록 배불리 먹으면, 눈을 돌려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업신여기고, 나와 세운 언약을 깨뜨릴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부르는 한, 이 노래가 그들을 일깨워 주는 증언이 될 것이다.” 22절, “그날에 모세는 이 노래를 적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 주었다.” 30절에서도 한 번 더 반복됩니다. “그리고 모세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끝까지 불러 이스라엘 대회에 모여 온 모든 사람의 귀에 들려주었다.” 이 노래는 이스라엘의 변질과 관련이 있고, 이 노래가 일깨워 주는 증언이 될 것이라며 하나님께서 주셨고, 부르라고 명령하신 노래입니다. 그 명령을 따라 모세는 그 노래를 “끝까지” 불러 이스라엘 대회에 모여온 모든 사람에게 들려주었답니다.
그 노래는 이스라엘의 변질에 대한 처방이었을 뿐만 아니라 모세 자신에 대한 처방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변질 가능성 앞에 서 있었듯이 누구나 그 가능성 앞에 서 있습니다. 문제는 노래를 만들어서 불러야 할 모세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 사람이 없고, 그 노래가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날, 그 공동체도 그 위험 앞에 서 있었으나 거기 모세가 우뚝 서 있었습니다. “하늘아,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땅아,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라.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풀밭을 적시는 소나기다.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채소 위에 내리는 가랑비다.”(1-2절, 새번역).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씀은 생명력과 직결된 요소로 소개합니다. 물이 귀했던 팔레스틴에서 비, 소나기, 이슬, 가랑비 등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를 바로 세워주고 힘있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2행이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면, 이어지는 3-4행은 여호와의 이름을 전하면서 그분의 현존과 속성을 말씀합니다. “내가 주님의 이름을 선포할 때에, 너희는 ‘우리의 하나님 위대하시다’하고 응답하여라. 하나님은 반석, 하시는 일마다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은 올곧다. 그는 거짓이 없고, 진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의로우시고 곧기만 하시다.” 변질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입니다.
• 세상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
지난 주간 한 조간신문에는 “이어령 마지막 인터뷰”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신문기자는 그를 그렇게 소개하면서 글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지성의 큰 산맥이었던 이어령. 22살에 문단 원로들의 권위의식에 비수를 꽂는 선전포고문 ‘우상의 파괴’로 유명 인사가 이후, 65년간 때로는 번뜩이는 광야의 언어로 때로는 천둥 같은 인식의 스파크로 시야의 조망을 터주었던 언어의 거인. 벼랑 끝에서도 늘 우물 찾는 기쁨을 목격하게 해준 우리 시대의 어른.”
건강이 좋지 않아 약속 날짜를 넘기기도 했는데, 이것이 마지막 인터뷰일 것이라고 했다는데 그래서인지 아주 긴 인터뷰였습니다. 그 가운데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그 부분이었습니다.
-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은 무엇인가요?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처음 받았던 가방, 알코올 냄새가 나던 말랑말랑한 지우개처럼. 내가 벌어서 내 돈으로 산 것이 아니었어요.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
-젊은이들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는지요?
“딱 한 가지야. 덮어놓고 살지 마세요. 그리스 사람들은 진실의 반대가 허위가 아니라 망각이라고 했어요. 요즘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잊어서 그래요. 자기가 한 일을 망각의 포장으로 덮으니 어리석어요. 부디 덮어놓고 살지 마세요.”
평생 무신론자로 살다가 암투병하던 딸의 죽음을 계기로 그는 하용조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죽는 것은 돌아가는 것이고, 내가 받은 모든 것은 선물이었다고 고백하는 그는 인터뷰 마지막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올해 그는 1934년 1월생이니 만 86세가 다 되어가는데 실제 나이는 2살이 더 많습니다. 현재 암 투병 중인데 항암치료를 마다한 채로 마지막 기력을 다해 책을 쓰고, 강연을 하고, 죽음까지 기록할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는 그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겨울이 오고 있구나… 그것이 계절처럼 오고 있구나. 그러니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
모세도 그랬습니다. 살아온 날들 돌아보니 모든 것이 은혜요, 선물이었습니다. 모세는 지난 40여년, 광야 길을 걸으면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하나님의 현존을 증거했습니다. 지금 그는 이 땅에서의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아마도 모세는 마지막 노래를 부르면서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에게 행복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탁하신 일을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전하고, 그것을 노래로 만들어 그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돌려드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그는 지금 죽음 앞에서 깨달아 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고, 그분이 주신 빛나는 선물로 살아왔습니다. 죽음의 문턱 앞에 서 있는데 돌아갈 집이 있습니다. 행복입니다. 그래서 나태주 시인의 시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에 담긴 “행복”이라는 시는 이렇게 행복의 이유를 밝혀 줍니다.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지난달, 저는 대전의 한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토요일에는 새벽기도회를 시작으로 온 교인들이 모여 다양한 행사를 가졌고, 저녁 집회 전에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아이빅밴드라는 찬양팀이 와서 1시간 동안 찬양을 했습니다. 그때 한 찬양이 유난히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때 이후 거의 매일 그 찬양을 듣고 있습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눈물 날 일 많지만 기도할 수 있는 것/
억울한 일 많으나 주를 위해 참는 것/
비록 짧은 작은 삶 주 뜻대로 사는 것/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세상은 알 수 없는 하나님 선물/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행복이라오//
눈물 날 일 많지만 기도할 수 있는 것/
억울한 일 많으나 주를 위해 참는 것/
비록 짧은 작은 삶 주 뜻대로 사는 것/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세상은 알 수 없는 하나님 선물/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 부디 아프지 마라
얼마 전 학교 새벽기도회에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 저에게 주어진 본문은 마가복음 16장이었습니다. 익숙한 말씀이지만 그동안 부활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면서 읽다 보니 놓치고 있었던 사실 한 가지를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신 그 영광스러운 아침에 그 현장에 서 있던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모두 열심히 있어서 새벽에 무덤도 찾았던 사람들이고,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을 유난히 사랑했던 여인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이야기, 헌신 이야기를 전하면서 마가 기자는 반복적으로 들려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영광의 자리에 서 있었으나 정작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살아계신 주님을 믿지 않았다...’
부활의 복음이 증거되던 자리에서 성경의 관심, 복음사가들의 관심은 세상이 얼마나 악한가, 복음에 적대적인 정치, 종교지도자들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가에 있지 않았습니다. 삶의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가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꾸 환경과 현상에 눈길을 주지만 마가복음의 말씀은 다른 것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영광의 자리에 서 있으나 하나님의 현존을 믿지 않는 사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가슴 떨리는 감격을 잃어버린 사람들... 즉 신앙인의 불신앙이 가장 문제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을 때 그들은 아직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태주 시인은 그렇게 부탁합니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인해 세상은 다시 한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인해 세상을 다시 한번 고요한 저녁이 오니 아프지 말랍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네가 쓰러지면 세상은 그런 은혜를 누리지 못하니 아프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시인은 공주 장기초교 교장을 끝으로 43년 교직 생활을 마치게 되었는데, 은퇴를 불과 몇 달을 남겨두고 악성 췌장암에 걸려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어야 했습니다. 아프니 가정도, 가족도, 학교도 모두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히게 되고 아름다운 가을도 한숨으로 덮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 시인은 외치고 있습니다. “가을이다 아프지 마라!”
• 더 거세질 파도 앞에서 마지막 노랠 부르듯
우린 오늘, 종교개혁 502주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미신과 우상으로 가득한 예배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예배개혁이었고, 교회개혁이었습니다. 그런데 500년이 지난 오늘, 지탄의 대상이었던 로마카톨릭은 한국 사회에서는 신뢰도 1위이고, 개혁을 표방하고 나온 개신교는 신뢰도가 하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잘못이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반기독교 정서를 넘어 이제는 탈기독교 시대, 기독교 조롱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국면으로 나간다면 한국교회 앞날을 더 어두울 것입니다. 이번 104기 예장 통합 총회는 그 시발을 예고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서고, 교회도 서고... 모세도 서고, 이스라엘 회중, 즉 카할, 에클레시아, 교회도 서고... 우리는 다시 옛날에 불렀던 노래를 꺼내어 들으며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일본 에도 시대의 대표적 목판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라는 작품입니다. 19세기 후반 서방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그의 작품이 서양에 소개되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후지산의 36경”(1831년)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인 후지산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작품인데 제목과는 달리 46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라는 작품도 그 가운데 한편인데, 장면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거대한 파도입니다. 파도 사이로 풍랑에 휩쓸린 배 세척을 볼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선을 운반하던 속도가 빠른 배라고 하지요. 생선을 내려놓고 돌아오는 길인지 빈 배의 모습인데, 8명이 노를 젓고 있고, 배의 앞부분에는 2명의 선원이 타고 있습니다. 이 배의 길이가 12m 정도였다니 파도의 높이는 15m가 훨씬 넘는 거대한 파도입니다. 이들이 거센 풍랑에서 빠져나갈 확률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대자연은 인간의 절망에 대해서는 무심합니다. 멀리 보이는 눈 덮인 후지산은 그들의 사투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서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다가 영감을 받아 드뷔시는 그의 교향시, “바다”를 작곡했습니다.
김응교 시인은 이 그림을 보다가 “파도 아가리”라는 시를 썼습니다.
“냉혹한 물 튀김/
카메라가 없었던 에도 시대/
화가의 눈은 튀는 물방울을 주시한다/
1만분의 1초를 포착하는 디지털 눈//
해발 3,776m의 후지산을 삼킬 듯 덤벼드는 파도/
마구 흔들리는 세 척 생선잡이 조각배에/
사공들이 아가리 앞에 납작 엎드렸다/
버티자 꽉 잡아//
괴물이 침을 슬어 놓고/
영산(靈山)은 묵묵히 버티고 있는 이 그림을 보고/
드뷔시는 교향곡 ‘바다’를 작곡했다지//
침묵 바다에 물결 퍼지고 해일이 몰려온다/
운명 앞에는 붉은 잔양(殘陽)은 예견 못 할 미래 마냥/ 음산하다/
치솟는 파도의 꼭지점/
교향곡의 절정에서/
까마득 뱃멀미 앓으며 소리친다/
지구의 모든 존재들아/
버티자 꽉 잡아.”
교회를 삼켜버리고 복음을 잠재워버릴 만큼 파도가 거셉니다. 바다는 흉용합니다. 꽉 잡고, 잘 버팁시다. 아닙니다. 우리 그 차원을 넘어가야 합니다. 버티는 정도 차원에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훨씬 어둡고 파도는 거셉니다. 교회는 흔들리고 있고, 그래서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훨씬 더 필요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우린 그 차원을 넘어가야 합니다. 모세는 외칩니다. 주님은 외칩니다. “이 노래를 힘껏 불러라. 그러면 그 노래가 너희를 세워줄 것이다.”
지난주일 오후 저는 오후예배 설교를 위해서 고대 쪽으로 가다가 어느 한 교회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한때는 우리 교단의 대표적인 교회였고, 자랑스러운 교회였는데 건물만 뎅그러니 서 있고 교회는 조용했습니다. 그 교회를 오래 목회했던 목사님은 우리 교단의 존경 받는 목회자로 총회장을 지냈고, 수년간 장신대에서 목회학을 가르쳤던 분이었습니다. 그 교회는 목회자를 배출했고, 그분에게서 목회를 배웠던 분은 우리 교단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목회자도 있습니다. 그분의 후임으로 오신 목사님이 20여 년을 잘 목회하여 교회는 평화로웠습니다. 그분의 은퇴 후에 후임으로 오신 목사님의 이상 행동으로 인해 교회는 찬반으로 나뉘어 거의 7-8년을 분쟁에 휩싸였습니다. 결국 반대 진영에 서 있던 교인들은 마지막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교회를 분립해 나갔습니다. 그 후에도 분쟁이 끊어지지 않았고,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면서 결국 그 목사님은 최근 사임을 했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7-800명이 회집하던 교회에 연세든 교인들 수십 명만 교회를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그 교회 앞을 지날 때 그것이 혹 한국 땅에 세워진 개혁된 교회의 모습일까 두려웠습니다. 저는 그 교회에서 2007년 12월에 부흥회를 인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성도들과 목이 터져라고 불렀던 주제찬양이 떠올랐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그 교회 앞으로 지나면서 그때 눈물로 찬양하던 성도님들이 생각 나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남은 성도님들이 힘을 내어 그 찬양 부르며 다시 일어서게 하소서.”
모세는 그날 죽음 앞에서도 사막길을 걸으며 불렀던 그 노래를 다시 부르며 일어섰습니다. 우리도 그 옛 노래를 부르면서 일어설 수 있을까요? 한국교회는 그 노래를 다시 부르며 일어설 수 있을까요? 더 힘차게 걸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도 고백하겠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가리라/
주의 영광 온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