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9 결단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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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의 신앙

(신명기 28:1-6)

[28:1, 58-59, 30:1-3 5271절 가사]

 

신명기 28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58.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59. 여호와께서 네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60.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붙게 하실 것이며 61. 또 이 율법책에 기록하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네가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62. 너희가 하늘의 별 같이 많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 되지 못할 것이라

 

신명기는 모세오경, 그러니까 토라라고 불리는 다섯 권의 책 중 마지막 책이다. 신명기라는 책은 <계명을 다시, 반복해서 들려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모세의 영도 하에 출애굽,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간의 생활을 보내야 했다. 4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출애굽을 경험했던 사람들, - 그들을 일컬어 출애굽 세대라고 부른다 출애굽 세대는 거의 죽고 그 다음 세대가 성장했다. - 우리는 그들을 40년간의 광야생활 중에 태어나고 자랐다는 의미에서 광야세대라고 부른다. 신명기는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으로 진군하기 전,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게 될 다음세대[광야세대]를 향해 다시 한번 선포된 하나님의 계명이 주된 내용이다. 출애굽 세대가 아닌 광야에서 태어난 다음세대를 위해서 선포되었다는 점에서 신명기는 이스라엘 신앙교육의 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교육의 기본서가 신명기인 것이다.

 

특별히 오늘 본문인 신명기 28장은 68절로 이루어져 있다. 신명기에서 가장 긴 장이다. 신명기 28장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에 받을 복과 불순종했을 때에 받게 될 심판의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281-14절까지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면 받게 되는 복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고, 그 이후 15-68절까지는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게 될 때 임할 심판과 저주의 선언이 등장한다. [축복의 말씀에 비해 저주의 말씀이 거의 네 배 가까이 길다. 이런 특징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 고대 근동 지역에서 발견된 계약이나 법전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한번쯤 들었을 법한 함무라비 법전, 현재 발견된 역사상 가장 오래된 법전이라고 할 수 있는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도, 저주가 축복보다 무려 스무 배나 더 길게 언급되고 있다. ]

 

I. 말씀에 순종/불순종할 때 받는 복과 심판

 

1. 말씀에 순종하면 받는 복(28:1-3; 1-14)

축복의 말씀을 보도록 하자.

[1-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이라는 문구는 축복의 서문에 해당한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명령에 순종하면 이스라엘을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모든 복이 그에게 임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3절부터는 이렇게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다. 성읍과 들에서 받게 되는 생활의 축복(3), 자녀와 토지의 소산과 가축의 새끼가 받을 축복(4), 식량의 축복(4,5), 일상의 축복(6)등이 언급되고 있다.

 

2. 말씀에 불순종하면 받는 심판(28:58-62)

이제 심판에 관한 말씀을 보자. 15절부터는 정반대로 불순종한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저주에 관해서 설명한다. [58]“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58) 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질병이 창궐하고 민족이 멸망해서 모두 뿔뿔이 흩어질 것을 경고한다. 출애굽의 구원을 철회하고 이스라엘을 다시 애굽의 노예로 끌고 가겠다는 저주의 내용이 나타난다.

 

28장은 신명기의 신학을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장이라 할 수 있다. 신명기의 전체 주제는 (방금 읽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임하는 축복과, 거역하고 불순종할 때 임하는 재앙과 심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불순종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신다. 순종하는 삶에는 복이, 불순종하는 삶에는 심판이 임한다. 이것이 신명기 28장과 신명기 전체 신학의 핵심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된다. 신명기 신학이 복과 심판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이것이 복을 받기 위한 신앙, 소위 기복신앙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명기의 신학을 기복신앙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신명기 신앙을 우리는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II. 신명기의 신앙

 

1.첫째는 들음의 신앙이다.

신명기는 모세의 입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들음을 강조한다. 오늘 본문에도 [1-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들음은 행함과 바로 직결된다. 오늘날 우리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신명기에 있어서 들음은 곧 행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듣고 행하는 사람과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을 구분한다면, 신명기에서는 듣는 자와 듣지 않는 자로 구분한다. 바르게 듣는 자는 들은 말씀을 당연히 실천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귀기울여 들으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들은 자만이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명기는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으라고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솔로몬의 이야기]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을 잘 아실 것이다. 솔로몬이 다윗을 이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하나님께 간절히 구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열왕기상 3:9에 따르면, 솔로몬 왕듣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다. 솔로몬은 왕이 가져야 할 최고의 자질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지식도 아니었고, 권력도 아니었다. 솔로몬은 왕이 절대 혼자서 스스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계명에 귀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나님께 듣는 마음”, 들을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던 것이다(왕상 3:9). 그렇게 하나님께 귀기울이는 듣는 마음을 사모했더니, 하나님은 솔로몬을 인류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왕의 대명사로 만들어 주셨다.

 

신명기의 정신에 따르면, 많은 지식이 신앙을 가늠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 신앙을 가늠하지 않는다. 들음의 능력이 신앙을 가늠하는 기준이었다. 갈릴리 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에, 하나님의 계명에 귀기울여 듣는 마음을 간직하길 바란다. 그리고 어린 자녀를 둔 부모님들, 적어도 바른 그리스도 신앙을 자녀에게 물려주길 원한다면,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일 수 있는 듣는 마음을 달라고 자녀를 위해 기도하길 바란다.

 

2.둘째 신명기의 신앙은 결단의 신앙이다.

오늘 28장에서도 하나님은 축복의 길에 설 것인지, 심판과 재앙의 길에 설 것인지를 결단하게 하고 있다. 결단이 무엇인가? 결단은 그 안에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선택이고 둘째는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이다.

 

먼저, 결단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분위기나 흐름에 떠밀려서 길을 가는 것을 결단이라고 하지 않는다. 결단은 자기 선택을 통해서 그 길을 가는 것을 말한다. 신명기는 다른 사람에 이끌려서 억지로 살아가지 말라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의 길을 선택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선택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는 말은 다른 하나를 포기한다는 말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선택했다면, 하나님의 길과 다른 쪽의 길은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선택했다면, 하나님의 것에 반하는 것은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간혹 하나님의 것과 하나님에 반하는 것을 둘 다 소유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안 된다.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면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물론 하나님의 것이 세상의 것과 모두 정반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것과 세상의 것은 엄연히 다르다. 우리는 그것을 구별할 수 있다. 따라서 때로는 하나님의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을 포기해야 한다. 비록 그것이 힘들지만, 아프지만,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의 자녀가 하나님의 길을 따라 가기를 원한다면, 세상의 길에서 떠날 수 있는,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가르치길 바란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좁은 길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가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가 있는 것이다. 혼자 좁은 길을 가기는 힘드니까 우리가 함께가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이다. 하나님의 길을 선택한 자들로 살아가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이다.

 

결단은 선택이다. 그리고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선택의 결과는 축복으로도, 또는 심판으로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선택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한다. 이것을 선택했다, 저것을 선택했다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성숙한 공동체, 성숙한 사회는 자기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우리 한국 사회는 여전히 미성숙한 사회인 것 같다.

 

창세기에 나타나는 인간의 타락은, 어쩌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따먹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금지한 열매를 먹은 후 자기 행동에서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고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모습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모습에 하나님께서는 더 실망하셨을는지도 모른다.

 

오늘 신명기는 결단하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향해 결단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가겠노라고 결단한 사람들이다. 그 길을 가는 우리들이 다른 길에 곁눈질해서 되겠는가? 뒷걸음질쳐서 되겠는가? 결단한 사람은 가야 할 방향만 바라보면서 그 길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다.

 

3.셋째 신명기의 신앙은 기회의 신앙이다.

신명기에서 말하는 축복과 심판은 한번 정해지면 돌이킬 수 없는, 회복이 불가능한 길은 아니다.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아 심판 가운데 있다하더라도, 다시 결단하고 말씀에 귀기울여 순종하면 그 상황은 언제든지 회복될 수 있다.

 

[30:1-3]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2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1-3] 비록 잘못된 길을 갔다하더라도,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으로 돌아오면, 돌이키면, 하나님께서도 마음을 돌이키시겠다는 말씀이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기회가 남아있다. 즉 신명기의 신앙은 아직도 늦지 않았음의 신앙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말씀에 귀기울이고 삶을 바꾸라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결단하고 삶을 바꾸면 언제든지 새로운 기회가 열린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누가복음 15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가 담고 있는 의미이기도 하다. 두 형제를 자녀로 둔 아버지가 있다. 어느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와서는 자기 꿈을 펼치려고 하니 자기 몫을 지금 내어달라고 말한다.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상당한 양의 몫을 내어준다. 그것을 받아든 둘째 아들은 곧 집을 떠나 먼 곳으로 가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게 된다. 그는 더 이상 가족과 부모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처음엔 돈이 있으니 친구들도 주변에 모여들었지만, 점차 돈이 떨어지고 사업도 실패를 거듭하다 보니 어느새 친구들은 다 떠나고 자기 몸을 돌볼 여력마저 없어졌다. 그때 비로소 둘째아들이 기억하게 된 것이 가정이고, 부모님의 사랑이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집으로 돌아온다. 성경은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겼다아버지는 늘 집 떠난 둘째 아들을 기다렸던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던 둘째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달려가, 껴안고, 입을 맞추고, 새 옷을 입혔다. 집 떠난 아들을 사랑으로 환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의 환대가 큰 아들은 못마땅했던 것이다. 큰 아들이 보기에 집 떠난 작은 아들은 전혀 가능성이 없는 놈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의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동생이었다. 그런 놈을 설득하고 변화시키기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아이를 아버지가 사랑으로 환대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고 그래서 분노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큰 아들과 달랐다. 아버지 생각엔 너무 늦은 것이 아니었다. 지금 둘째 아들이 정말 회개하고 돌아온 것인지, 정말 정신차리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온 것인지,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보기에는 일단 돌아온 것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일단 돌아왔으니 그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가족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는 것이다. 아직 늦은 것이 아니었다. 둘째 아들을 좀 더 기다려주면, 그러면 망나니 같던 아들이 다시 마음을 돌릴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찬송가 527장은 이렇게 노래한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감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 보다 넓고 넓어

 

그렇다. 사실 맘 구석구석엔 둘째 아들과 같은 모습이 남아 있지 않는가? 하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기회가 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주님께 돌아가면 된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전히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갈릴리 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여전히 주님을 떠나 방황하는 그런 삶이 아닌가?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해서 잘못된 길을 계속해서 가고 있지는 않는가? 아니다. 오늘 성경은 아직 기회가 있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결단하도록 해야 한다. 주님을 향한 길,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길을 선택해서 가야 할 것이다. 주님에 반하는 길, 주님께서 원하지 않는 길은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세상 사람들이 그 길이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 길이 하나님에 반하는 길이라면 포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결단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그 하나님나라의 복음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마음,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하자. 나 혼자서는, 내 자신의 판단으로는 바른 길을 갈 수 없다.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일 수 있는 마음, 들을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을 우리가 기대하고 소망해야 하지 않겠는가?.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일 수 있는 마음,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그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을 만을 따를 수 있는 결단을 하게 하시고, 혹여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보살피시고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하옵소서. 주님가신 그 길을 되새기며 제자됨을 결단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