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01 그리스도인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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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세

(창세기 1:31)

 

여러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멋쩍게 해드려서... 이 시간 우리가 힘을 내어서 앞뒤에 계신 분들에게 이렇게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보고 있어도 그립습니다.” 한 번 더 인사하도록 하겠습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리려고 동시를 들고 왔는데요. 제가 동시작가 중에 곽해룡이라는 선생님이 계세요. 이분이 귀뚜라미라는 동시를 쓰셨는데 한 번 들어보세요.

 

귀뚜라미가 귀뚤귀뚤 귀뚤귀뚤

막힌 귀를 뚫어준다.

대못처럼 내 귀에 꽉 막힌 소리

귀뚤귀뚤 귀뚤귀뚤 말끔하게 뚫어준다.

 

우와~ 이야~ 좋으시지요?

여러분, 살아가시면서 못된 소리 많이 들으셨어요? “네까짓 게 뭔데, 별것도 아닌 게.” 그런 못된 이야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셨는지요. 그거 뚫어내라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뚜라미를 주셨답니다.

 

한 편 더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 손가락이 대부분 열개인데 우리 손가락이 왜 열개인지 아세요? 한민복이라는 시인이 이렇게 시를 적었습니다.

 

손가락이 열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세상에 이런 존재라는 겁니다. 우리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고 이걸 손꼽아 세었다는 겁니다. 한 달,,,, 두 달... 열 달 그래서 손가락이 열개 인 채로 두 손 꼭 쥐고 세상에 태어나왔다는 겁니다.

 

한 편 더 읽어드리겠습니다. 김기현이라는 아동문학가 선생님이 계시는데 비오는 날동시를 쓰셨어요. 한 번 들어보세요.

 

후두둑 후두둑..........

작은 물방울 글씨로

촉촉히 답안지를 가득 메워

 

주룩 주룩 주루룩.......

여기도 동그라미

저기도 동그라미

채점을 한다.

 

비 오는 날은

여기도 백 점

저기도 백 점

 

 

틀린 곳 하나 없이

사방이 동그라미

모두가 백 점이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면 물이 조금만 고여 있어도 빗방울이 떨어진 곳에 파장이 일어나는데, 이 파장이 세모나게 네모나게 이는 게 아니라 동그랗게 퍼집니다. 왠지 아세요? 지금 우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신 중이시랍니다. “! 너 그 살아가는 인생 괜찮은 거야, 너 동그라미. ! 너도 틀린 인생 아니잖아. 너도 동그라미. ! 너도 그만하면 백점짜린 거지 너도 동그라미. 그래서 사방이 동그라미 모두가 백점이라고 우리 하나님께 말씀하시는 중이랍니다.

 

저는 이 아침에 여러분들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하여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조금 뜬금없다 싶지만 동시를 읽어드렸습니다. 이런 시적 감성 말입니다. “그냥 귀뚜라미지 뭐, 그냥 귀뚤귀뚤 의성어 빗대서 말한 거야. 손가락이 열 개지 뭐. 하늘에서 빗방울 떨어지는 거 과학적 파장인 거야.” 이러면 할 말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어떤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낭만이라는 단어를 아세요? 독일의 낭만파 시인 가운데 프레드리히 노발리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낭만이라는 것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낭만이란 평범한 것에서 거룩한 가치를, 일상적인 것에서 숭고하기까지 한 의미를 발견해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일상을 살잖아요? 평범을 살잖아요? 한번 그저 평범을 산 가족에게 물어보세요. “여보, 얘들아 오늘 어떻게 지냈니?” 그러면 별일 없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그 평범 속에서 거룩과 숭고를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느덧 낭만이라는 것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 감동을 잃지 않습니다. 왠지 아세요. 믿음이라는 감각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다섯 가지 감각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그래서 눈으로 보는 것마다 좋기를, 귀로 들리는 소식마다 복된 소식이 들리기를, 맛있는 것 먹고, 좋은 냄새 맡고, 만지는 것마다 감촉이 좋기를 원하고 바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에 매몰되어 살아가다보면 좋은 일이 있으면 즐거워해요. 슬픈 일이 있으면 울어요. 화나는 일이 있으면 화를 냅니다. 그게 인지상정이라 사람 다 그렇지 뭐 그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리스도인은 또 다른 감각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 감각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고백합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궁궐에 살아야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찬송가는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 천국이고 하나님 나라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게 되면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립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각기관을 초월한 또 다른 감각이 열리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주님과 내가 나눈 이 기쁨을 누가 알겠습니까? 사실 요 사이 살아가는 인생이 버거웠던 것입니다. 물론 흔들리지 않는 실존은 존재하지 않는 법일 테지만, 마음 무너지지 않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법일 테지만 너무너무 삶이 어려워서 잠을 못잔 겁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했던 겁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녘에 아직 장미꽃 위에 이슬이 사라지지 않은 그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 다 알고 있다. 괜찮을 거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해주시는 게 들리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누가 알겠느냐고 찬송가 가사의 작사가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교회 공동체 여러분 그것을 일컬어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그리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저 어려운 상황에 화를 내고 슬퍼하고, 좋은 일이 생기면 즐거워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도 그렇게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이 어려울지라도 힘겨울 지라도 우와 하나님 여기가 하나님 나랍니다. 이야 주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노래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면 참 좋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지 아세요? 오늘 우리 읽은 구약 본문의 말씀, 창세기 1장에는 우리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고 좋아하셨답니다. 우리를 지으시고는 심하게 좋아하셨답니다. 그때 좋아하셨다는 히브리어 말은 토브입니다. 이 단어의 뜻을 가르쳐 드릴 테니까 표정으로 따라해 보세요. 두 눈을 크고 동그랗게 뜨고 입도 한번 찢어보세요. 이 민망한 얼굴을 가지고 옆에 있는 분들을 쳐다보시면서 감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야~ 우와~” 이것을 토브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창조하셨을 때는 인간의 타락 범죄 전이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충분히 우와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이 아무리 각기 제 갈 길로 가도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패역하고 반역해도 하나님 줄기차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언자들을 통해서 사사들을 통해서 줄기차게 말씀하셨던 것은 내 백성 예루살렘아 이스라엘아 유다야 야곱아 제발 좀 돌아오라. 돌아오라. 돌아오기만 하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고 너희는 또 다시 내 백성들이 될 것이다. 너희가 돌아오기만 하면 너희를 선대하리라. 긍휼을 베풀리라. 너희를 용서하고 관용할 것이며, 너희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라.” 각기 다르게 표현을 했습니다만 히브리말로는 모두 다 토브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시대가 지나건 상황이 어떠하건 우리에 대하여 우와하셨던 것입니다. 이게 왜 중요한지 아세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우리를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셨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있는 생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우리를 바라보실 때마다 우와~ 하셨던 겁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 하나님께서는 도와주셨던 겁니다.

 

여러분 인생에게 문제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문제가 없다면 그는 산목숨이 아닐 겁니다. 사람이라면 입에 한숨 가득합니다. 눈에 눈물날 때가 있을 겁니다. 가슴에 큰 돌덩이 하나 있는양 답답함이 느껴질 때가 있는 겁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람은 죽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그런데 그때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이야우와이렇게 바라보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라보는 하나님의 말씀 이 성경책을 일컬어 ‘The Book of Life’라고 생명의 책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봅니다. 말씀을 통해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예배드리기 전 예배드리기 후 ,말씀읽기 전 말씀 읽은 후, 기도하기 전 기도한 후, 상황의 변화는 없을지라도 내 마음에 하늘의 평강이 찾아옵니다. 나도 모르게 찬송이 터져 나옵니다. 내 한숨이 변해서 기도제목이 되고 내 눈물이 변해서 찬송이 되더라는 겁니다. 여러분 그래서 기적을 바라는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이 자세를 우리들에게 보다 분명하게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복음서의 말씀을 가만히 보면 이 말씀은 사실은 센세이셔널한 말씀입니다. 왠지 아세요? 예수님 주변에 모여들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중에 여러분 마태복음 4장 마지막부분을 찬찬히 읽어보세요. 4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예수님 주변에 모여 들었던 사람들의 면면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지리 복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아세요? 우리 성경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이렇게 시작이 되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마카리오이(makarioi)’ 라는 단어가 먼저 등장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세요? 강복입니다. 복의 선언입니다. 세상에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어려운 가운데에도 심령이 가난할 줄 아는 여러분, 애통해 할 줄 아는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유 할 줄 아는 여러분, 의에 주리고 목마를 여러분,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휼이 여길 줄 아는 여러분, 다 제 각각 욕심 부리고 사는데 마음이 청결한 여러분, 화평케 할 줄 아는 여러분, 의로움 때문에 핍박당할 줄 아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선언하셨던 겁니다.

 

그러고 나서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머릿속으로 뭐 우리가 그렇게 필요한 존재라구요. 주님 뭘 잘못알고 계시네. 세상물정도 모르시네. 사람들이 우리더러 너 같은 건 소용없는 존재라고 아무짝에도 소용없다고 그러던데.’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왜 자꾸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 이 말씀도 사람들은 안 믿었을 겁니다. ‘세상이 우리더러 깜깜하다던데요? 우리보고 아무것도 안보보이는 인생이라던데요.’ 아닙니다. 여러분은 세상이 빛입니다. 사람들이 등불을 들어서 말 아래 두는 게 아니라 등경위에 두는 법입니다 여러분의 착한 행실, 어렵고 힘든 행위지만 좋은 행실을 통해 산위에 있는 동네가 다 드러나게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됩니다. 이것을 권면하셨던 겁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은 망했다.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우와, 이야그렇게 세상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그런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도 그리 살아야 되는 것 아닐 런지요. 여러분께 한번 여쭙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공동체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그런 하나님이라면, 우리도 그런 삶의 모습으로 살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우리 주님께 받은 이 풍성한 은혜를 누군가의 풍성함을 위해 나눠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쩌면 그리 살아간다는 게 영 쉽지 않고 마음에 내키지 않는 탐탁지 않은 일 일겁니다. 그런데 그리 살아야 되겠습니다.

 

자 이제 그러면 한번 연습 해 볼게요. 앞 뒤 옆에 세 분 이상을 바라보시고 눈을 크게 동그랗게 뜨고 우와, 이야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거 여러분 댁에서, 직장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상상해 보세요. 예배가 끝나 같이 식사도 하고 교제도 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고 이제 댁으로 돌아가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우와~ 세상에 누가 해놨는지 청소를 다해놨어요. 그냥 막나왔는데 설거지도 다해놨어요 세상에 다리미질도 다 해놓고 애들은 어머니 아버지 앞으로 열심히 살겠습니다.” 인사를 합니다. 배우자는 여보 우리 열심히 살아요.” 어깨를 두드려 줍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건 그냥 상상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실은 예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난장판입니다. 애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싸우고 난리가 났고, 배우자는 어디 갔다 왔느냐고 소리 지르고 또 밥해야 되고, 청소해야 되고, 빨래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럴 때 우와, 이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실 내 삶의 현재가 영 고까운데 말은 지지리도 안 듣는데 뭐 저런 게 다 있나 싶은데 우와, 이야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눈물 나는 일입니다. 사실 머리에 꽃만 안 꽂았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을 위선이라고 여기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을 믿음의 고백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 신앙을 그렇게 드러내실 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 감동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까? 감격적 순간들이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까? 내 신앙이 바닥을 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에서 누구를 바라보던 어디를 가든 우와~ 이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왠지 아세요? 그리스도인들의 두 눈에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눈이 밝아지는 것, 영안이 열리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믿음이 열리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은혜에 우리들의 눈을 둘 줄 아는 사람들은 상황에 매몰된 듯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내 여건에 함몰된 듯, 내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리는 인생들이 아닙니다. 내 상황이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을 뛰어넘습니다. 아니 그 상황의 깊숙한 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줄 압니다. 그래서 낭만적인 인생을 살아갈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숨 쉬고 고개 푹 숙이고 살아갈 때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말합니다. “집사님, 장로님, 권사님 어렵다면서요, 요새 힘들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이때 우리의 대답은 괜찮아요. 하나님께서 잘해주고 계세요.” 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그렇게 살아간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상처를 딛고 용서를 이루는 삶이 어렵습니다. 전 인생이 걸리는 일입니다.

 

사실 화해를 이루고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목 한다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서신서에서 우리가 읽은 대로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낸다는 것은 일생이 걸리는 일입니다. 어쩌면 그 지난한 인생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피하지 않고 돌아서지 않고 씩씩하고 당당하게 내 앞의 삶을 한 걸음 한걸음 걸어갈 줄 아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믿음 안에 승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릴리에서 오신 우리 주님의 마음, 갈릴리에서 사역하셨던 그 마음이 우리 마음에 가득하길 원합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계신 대부분 다 부모님이니까 아시잖아요? 어쩌면 자식 낳고 결혼하고 가정이루고 살아가면 좋은 날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풍파 경험하다보면 이런 일도 경험하고 저런 일도 경험합니다. 그 때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속상해 하지만 그게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때 우리들의 믿음을 증명해야합니다. 그때 내 주어진 상황에 대해,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우와, 이야해야 합니다.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하면 그 사람이 살아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깨가 축 처져서 집으로 들어갑니다. 죽고 싶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나를 바라보더니 우와, 이야우리 아버지가 오셨다. 우와, 이야우리 어머니가 오셨다. 우와, 이야우리 아들이 왔네. 우와, 이야우리 딸이 왔네. 그런다면 한 번 더 살아보자 싶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그런 존재거든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주의 성령을 통해 날마다 우리를 깨우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 같은 인생이 무엇인데? 나 같은 무지렁이 같은 인생이 어떤 존재인데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런 은혜를 가진 사람들은 우와, 이야주님 감사해요. 주님 고맙습니다. 그것을 고백하면 참 좋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떡과 잔에 참여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이 Holy Communion 함께하는 공동체 연합의 순간에 참여하시며 한번 마음을 다잡아 보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어려운 내 가정이지만, 내 직장생활이지만 세상살이가 힘겹지만 하나님 우와, 이야하고 살게요. 우와, 이야하고 생명을 전하는 사람 될게요. 그것을 다짐하는 우리이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 이 시간 고요히 묵상함으로 오늘 말씀을 생각하시며 함께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