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할 날은 얼마나 남았을까
(시 90:9-12, 계 1:8-20, 벧전 4:7-10)
• 그 외로운 날의 한 결심
전쟁이 끝나고 온 나라가 공산화 되면서 반혁명죄로 한 남자가 체포되었습니다. 그렇게 끌려간 그는 13년 6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습니다. 그 가운데 9년 동안은 창문도 없고 햇빛 한 자락 들어오지 않는 독방에 갇혀, 우글거리는 바퀴벌레와 쥐와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언제 풀려날 수 있을지 가늠할 수, 그렇게 끝나가는 것 같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다 깨닫습니다. 그의 책에는 당시 상황이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저는 체포되었습니다. 사이공에서 나트랑까지 450km 거리를 경찰관 두 사람의 호송을 받으며 밤중에 여행하는 동안 저는 죄수생활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슬픔과 공포, 긴장 등의 수많은 착잡한 느낌이 제 마음을 스쳐 지나갔고 저의 식구들로부터 멀리 격리된 제 가슴은 갈가리 찢겨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밤의 어둠 속에서 그리고 걱정과 악몽의 바다 한가운데서 저는 조금씩 다시 깨어납니다... 중국 선교사였던 존 월시가 여러 해 동안 옥고를 치르고 자유의 몸이 된 뒤에 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나는 삶의 반평생을 기다리는 데 소비했다.” ...나는 작정했습니다. ‘나는 기다리지 않으리라. 현재의 순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서 살아보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어느 날 밤, 한 줄기 빛이 비쳤습니다. ‘그것은 매우 간단한 것이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했던 것처럼 하여라. 다른 공동체에 편지를 써서 보내어라.’”
그 음성을 듣고 그는 그렇게 결심했답니다. “나는 기다리지 않으리라. 현재의 순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서 살아보리라. 먼 미래를 기다리면서 현재의 순간을 무력하게 놓쳐버리기보다 지금 흘러가는 이 순간의 나의 생각, 말, 느낌, 눈빛, 행동 하나하나에 사랑을 담아보련다.” 종이 한 장 구하기 어려운 감옥에서 그는 달력 뒷면에 편지를 써서 감옥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나중 그 편지들을 묶어 세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는데 그중 한 권인 『지금 이 순간을 살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베트남의 사도 바울,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성신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하비에르 우엔 반 투안의 이야기입니다.
• 인생의 노래가 끝나갈 때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게 감옥에 갇혀 있는 한 사람을 우리에게 소개해 줍니다. 말씀을 깊이 읽다 보면 그는 그 아픔의 시간을 사랑의 노래로 가득 채우고 있음에 놀라움을 갖게 합니다. 열두 제자 중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어린 교회를 가슴에 품고 사역하면서 많은 고통을 당하였던 그는 도미티안 황제 박해 때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에게해 중간에 있는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 다양한 주장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AD 94년경 전후로 잡습니다. 로마제국 시대, 밧모 섬은 종교, 정치범들을 귀양 보냈던 유배지였고, 한번 갇히면 황제의 특명이 아니고서는 풀려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섬은 거의 바위로 덮여 있어 나무가 많지 않아 땔감이 부족하여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에 떨어야 했고, 여름에는 바위가 품어내는 열기 때문에 오래 견디기가 어려운 그런 곳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어려운 자리에서 인생의 노년을 보내고 있던 노사도가 고난 가운데 있는 소아시아 교회에 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어린 교인들과 함께 AD 60년대, 네로 황제의 참혹한 박해로부터 AD 96년까지 15년 동안 권좌에 있었던 도미티안 황제의 대박해 기간까지 온몸으로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권력자의 핍박과 회유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왔지만 이제 그곳에서 생을 마쳐야 할 시간에 서 있었습니다. 3세기 말 문헌인 빅토리아누스의 『요한계시록 주석』에는 “요한이 도미티안 황제의 정죄로 밧모 섬 광산에서 복역하는 중 이 계시를 보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상상력을 동원해 생각해 보면, 팔순 노구를 이끌고 요한은 그날도 광산에서 어쩌면 돌을 깨고 있었을 것입니다. 10절 말씀에 의하면 그렇게 노역에 시달리다가 주일이 되었습니다. AD 321년 이후에야 주일이 휴일이었으니 그날도 끌려가 아침 일찍부터 돌을 깨고 무거운 돌을 옮기는 힘든 일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 부활하신 주의 날인데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점심시간 석광산에 식사가 배달됐을 것이고 어쩜 요한은 가까이 지내는 간수에게 부탁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제가 섬기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인데 점심시간에 여기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좀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함께 예배할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그의 가슴 벅찬 설교를 들어줄 교인도 없습니다. 인생이 끝나가는 그 시간, 인간적으로 보면 결코 행복하지도 성공한 것도 아닌 모습이기에 어쩜 원망도 터져 나올 수 있는 그런 상황에서 그 노사도는 주의 영에 이끌려 예배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그분의 이름이 다시 들려지고
그도 인간인데 그런 상황이 힘들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그 캄캄하고 암울한 땅에 하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 어두운 방에 한 자락 빛이 비취어 오자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8절). 시간의 시작도, 마지막도 하나님의 것이랍니다. 지금 어두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모든 끝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답니다.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다는 표현은 유한적인 존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그분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보시고 미래를 보시는 분이시랍니다. 이렇게 요한계시록은 그 하나님에 대한 표현을 다양하게 설명합니다만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1:4). 이런 표현은 아주 자주,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1:4, 8, 4:8, 11:17, 16:5). 우리말 번역은 11장 17절을 시제 순서를 따라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라고 번역하였지만 헬라어 원어는 본래 현재를 강조하는 특성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던 주...” 시제 순서를 따르지 않고 “지금도 계신 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설교자는 지금 줄기차게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계신다... 주님은 지금도, 오늘도 역사하신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보이는 시간, 인생의 노래가 다 끝난 것 같은 시간, 원하는 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는 시간, 모든 게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한밤중과 같은 시간에도 주님은 함께 계시고, 일하고 계심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멀리 멀리 갔더니”라는 찬양은 한국교회 아주 초기에 한국인을 위해 만들어진 찬양입니다. 윌리엄 피셔가 만든 “I am trusting, Lord, in Thee”라는 곡에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량) 선교사의 부인, Annie Baird(안애리)가 가사를 붙인 찬송이었습니다. 배위량 선교사는 1890년 12월 18일, 결혼식을 올리고 바로 그날 오후에 조선을 향해 출발하여 두 달간의 긴 항해를 마치고 1891년 1월 29일에 부산항에 도착했습니다. 1891년 9월 부산 선교 스테이션을 개설하고, 부산진교회와 영서현교회(초량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부산 땅에 파란 눈을 가진 서양 선교사는 그들뿐이었으니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요? 1892년 7월에 딸 낸시를 선물을 받았습니다. 낸시는 그들에게 주신 하늘의 큰 위로였습니다. 베어드 선교사는 1년에 7개월 이상을 아내를 혼자 남겨 놓고 밀양, 경주, 울산, 대구, 상주, 안동까지 순회전도여행을 가졌습니다. 언젠가 전도여행 중에 딸 낸시가 아프다는 기별을 받습니다. 얼마 전 책을 집필하다가 이때의 일기(1894년 5월 7일 자)를 읽으며 눈물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막 저녁 식사를 끝내고 환자 몇 사람을 보고 있을 때 연락원이 집에서 편지를 가지고 왔다. 로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알리는 이 편지를 여행 중 노상에서 나에게 전달하지 못하여 찾아 헤매다가 들고 온 것이었다. 편지에는 그날 아침에 로지에게 발작이 있었고 즉시 집으로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내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나는 몇 가지를 지시하고 즉시 온 힘을 다해 집으로 향했다... 허공을 허우적거리며 걷는 것 같았고, 수십 톤에 해당하는 무거운 짐을 끌고 가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눈물이 복받쳐 올라왔다... 주일 아침, 로지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우리의 바람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기도하면서 우리는 로지를 하나님의 손길에 위탁했다. 정오쯤 하나님께서 로지를 데려가시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깊은 물 속을 헤쳐지나가 본 사람 말고는 누가 그때의 슬픔과 아픔을 알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로지를 데려갈 권리가 있으며 나는 로지를 데리고 있을 자격이 전혀 없다고 하루종일 고백하려고 나는 애썼다. 계속해서 짧은 기간 동안이라도 로지를 나에게 맡겨주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무거웠다.
5월 13일 주일 저녁, 로지가 자는 시간인 8시경에 로지를 하나님 품으로 데려가셨다... 로지는 편안히 잠들었다... 아버지 저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나의 아이가 당신의 것임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저희에게 맡겨 두셨기 때문에 저는 그를 저의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가장 아름답고 귀한 것을 데려가셨습니다... 저는 이 땅에서 울고 있지만 그는 가장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천국에서 노래할 것입니다.”
1894년 5월, 딸 낸시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만약 미국에 있었다면 충분히 살릴 수 있는 뇌수막염 때문이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그 슬픔 중에도 베어드 선교사는 선교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 며칠 후 북쪽으로 떠났습니다. 부인 애니 베어드 선교사는 혼자 남아 깊은 외로움과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고국과 가족을 떠나 복음 때문에 멀리 조선 땅까지 왔습니다. 남편은 지금 순회 전도를 위해 멀리 멀리 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딸도 다시는 볼 수 없는 멀리 멀리로 떠나보냈습니다. 그러한 아픔과 눈물을 담아 쓴 것이 바로 “멀리 멀리 갔더니”라는 찬송시입니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워 정처 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그 아픔의 시간, 주님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고, 주님 손에 붙들리기를 원하였던 것이지요. 사도 요한도 지금 고통 가운데 있는 교회, 힘들고 답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교회에 그렇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던 주님께서 너희를 다스리고 계신다!”
• 주의 영에 이끌려
어려움과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들이 믿음이 출중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손에 붙잡혔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의 손을 잡으면 너희는 일어설 수 있다...” 그를 세웠던 것은 그의 경험도 아니었고, 연륜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다음 말씀을 보면 소아시아의 교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노 설교자는 지금 받은 말씀을 전할 수가 없어 그것을 편지로 써 보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부복하는 성도, 교회만이 어려움 속에서도 승리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선교사 부부는 오전에 결혼식을 마치고 그날 오후에 선교지를 향해 달려갈 정도로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고, 부산과 경남북의 내지선교를 개척하여 선교의 초석을 놓으면서 수많은 교회를 세웠으며, 나중 평양으로 선교지를 옮겨서는 그곳에 숭실대학을 세워서 근대 교육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기에 어느 선교사보다 많은 사역을 감당했고, 본국에 보낸 선교 보고 횟수를 단연 앞섭니다. 그런데 지난겨울, 그에 대한 문헌을 찾아 연구하다가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매년 그렇게 많은 선교 보고서를 보냈던 그가 1917년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1914년, 부인 애니 베어드 선교사는 암에 걸려 치료차 혼자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병세가 심해져 치료를 포기하고 40일이 넘게 걸리는 그 먼 뱃길을 달려 다시 조선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조선 땅에 묻히기 위해서였고, 미국에서 죽게 되면 자기 장례 때문에 조선에서의 남편의 사역이 잠시라도 중단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였습니다. 1916년 6월 9일,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평양 땅에 묻혔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917년도에는 그렇게 선교 보고가 줄어든 것입니다.
그 힘든 시간, 그는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사진을 보겠습니다. 그 부부에게 첫 아이가 세상을 떠난 1894년은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찬송이 만들어진 때가 가장 힘들었던 때, 1895년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어려울 때 간구의 마음을 찬송에 담은 것입니다. “나는 갈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어디 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어디 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 어려움의 시간, 주님께 붙들리기를 간절히 소원했다는 말이지요. “아이같이 어리니 나를 도와주소서/ 힘도 없고 약하니 나를 도와주소서/ 힘도 없고 약하니 나를 도와주소서// 마음 심히 슬프니 나를 위로하소서/ 의지 없이 다니니 나를 위로하소서/ 의지 없이 다니니 나를 위로하소서.” 무슨 이야기입니까? 주님의 손에 붙들리길 원했다는 말이지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거의 방에서 나오지를 않았다는데, 아내가 남긴 그 찬송을 부르며 고백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힘차게 사역하다가 1931년 주님 품으로 갔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때 사도 요한이 주님의 날에, 주의 영에 이끌려 예배를 드리고 있는 광경을 전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그 답답한 삶의 자리에 하늘이 내려옵니다. 감격하고 있는 그를 주님의 영이 그를 천상의 예배 자리로 끌어올리십니다. 거기에는 먼저 간 사도들이 서 있습니다. 먼저 간 성도들도 서 있습니다. 거기에는 주기철, 손양원, 윌리엄 베어드 목사님도 보좌 곁에 서 있습니다. 계시록 4-5장 말씀을 보면 천군 천사들과 함께, 먼저 간 성도들과 함께 가슴 벅찬 찬양을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의 자리는 바로 그런 자리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의 예배를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고 땅이 하늘로 올라가 잇대어지는, 즉 “하늘과 땅이 잇대어지는 신비”로 규정합니다.
주의 영에 이끌리니 말씀이 들려옵니다.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입니다. 들리지 않던 음성이 들립니다. 주의 영에 이끌리니 지금도 살아계시고 오늘도 나의 삶을 다스리고 계시는 주님이 보입니다. 언제 교회가 어려워졌습니까? 큰 건물과 좋은 시설이 없어서였습니까? 쾌적한 환경과 좋은 음향과 영상 장비가 없어서였습니까? 주의 영에 이끌리지 않았을 때 교회는 언제나 위기 가운데 놓였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상황 가운데 서 있었지만 주님의 영에 이끌려 하늘을 보고 있습니다. 그 설교자가 벌떡 일어나 그가 보았던 것을 생생하게 성도들에게 전합니다.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양털 같으며, 그의 눈을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나는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맑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의 입의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13-16절). 성도들과 함께 거기에 우뚝 서 계시는 분을 보고 있습니다. 전에 갈릴리 바닷가에서 뵈었던 모습과는 전적으로 달랐습니다. 과거에 그분은 수수한 옷을 입었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는 맨발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왕의 모습이었습니다. 엄위에 찬 심판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감격하여 엎드렸고, 숨이 막힐 것 같은 전율에 죽은 것 같이 되었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또 들려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17절).
주님은 교회들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시는 분이시랍니다. 교회를 다스리시고, 인생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랍니다. 그렇습니다. 그 고백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고, 모든 것이 세워집니다. 그 고백이 약해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인생도, 가정도, 교회도, 나라와 민족도 무너집니다. 그것을 알고 인정하며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작년 이때, 저는 미국의 한 한인교회 주일예배에서 전할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장로교회 소속 한인교회로는 제일 규모가 있었고, 남미, 중국, 동남아, 북한, 아프리카 선교에 헌신하던 교회였습니다. 성도들과 함께 캄보디아 선교지에 다녀오신 후 무리가 되어 목사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심장마비였습니다. 후임 담임목사 청빙을 하다가 마음들이 나뉘어 큰 어려움 가운데 있는 교회였습니다. 마음이 나눠진 교회에 어떤 설교가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기 때문에 말씀 준비가 힘이 들었습니다. 설교가 잘 풀리지 않아 이리저리 고심하고 있는 한 동시를 읽다가 미소가 번졌습니다. 갑자기 확 열리는 느낌이었습니다.
“할머니 큰방 벽에 걸린 시계가 잔다”
“그냥 놔두라 좀 쉬구로 지는 언제 쉬어 보겠노”
“할머니는 시간 어떻게 알려고 그라노”
“하늘에 걸린 시계 보면 되지
모내기 하소
콩 심으소
장 담그소
김장하소
팥죽 끓이소
하늘에 걸린 시계가 알려주는 대로 살다 보니 참 바쁘게 살았는기라.”
바로 설교가 풀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시를 읽고 나서 마음에 깊은 충격이 들어 잠시 밖으로 나가 보았습니다. 7월 중순, 미국 동남부의 하늘은 푸르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태양은 장엄할 정도로 빛나고 있습니다. 하늘을 보는데 마음에 깊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하늘에 걸린 시계를 보면 되지...’ 1세기, 그 어둡고 캄캄하던 시간, 교회에 들려주시는 하늘의 메시지도 바도 그것이었습니다. ‘하늘에 걸린 시계를 보면 되지...’
그렇습니다. 너무 바쁘고, 내 생각과 주장이 너무 강하고, 거기 매몰되어 살다 보면 우린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의 시계를 볼 여유도 없이 달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지치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마음이 상하고, 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오늘은 흔들리고 있는 연약한 제자들 가운데, 교회 가운데 성령님께서 임하신 날입니다. 성령님은 오늘도 교회 안에 계시고, 성도들 안에 계십니다. 계속해서 기억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늘 성령님을 바라보고, 소통하고, 의지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랐습니다. 말과 행동, 생각에서 그분을 앞서지 않으려고 몸부림쳤고, 주의 영에 이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성령님께 컨트롤 받기를 원하여 엎드렸습니다. 그때 그들은 복음의 능력을 가진 교회가 되었습니다.
• 그의 노래가 이어지다
혼자서 외로운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평생 달려온 결과가 죄수로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아야 할 외로운 노년에 서 있었지만 주의 영에 이끌리니 그의 노래는 이어집니다.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성도들에게 전해 주기 위해 벌떡 일어섭니다. 그러나 한번 갇히면 황제의 특별사면이 아니면 풀려날 수 없는 자리에 묶여 있는 죄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나 들어줄 성도가 아무도 없는 설교자였습니다. 주저앉습니까? 아닙니다. 붓을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편지로 써 보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 1, 2, 3서였고, 요한계시록이었습니다.
인생의 모든 것이 접히는 그 시간, 그의 사랑 노래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노라. 그 때문에 나는 밧모섬에 유배되어 인생 마지막인 줄 알고 열심히 마지막 노래를 불렀었노라....” 그것이 끝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더 깊어지고 뜨거워졌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래를 더 부를 수 있도록 연장해 주십니다. 그 황량한 섬에서 그는 노래하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AD 96년, 그 강력한 권력자였던 도미티안 황제가 정적에게 암살을 당합니다. 새 황제의 특별사면으로 사도 요한은 풀려납니다. 그리고 에베소로 갑니다. 그곳에서도 그의 노래는 계속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제롬이 그 상황을 기록으로 상세하게 전해 줍니다. 백발이 성성한 요한은 기력이 쇠하여 다른 도시에 있는 교회에까지 말씀을 전하러 갈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로 에베소교회에서 말씀을 전하였답니다. 강한 햇빛이 쏟아지는 어느 여름, 어두침침하고 허름한 지하 예배실에 교인들이 모였습니다. 주옥과 같은 예수님의 설교를 직접 들었던 주님의 사랑하시던 그 제자가 설교를 시작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서로 사랑하라…” 그 설교가 지난주 설교와 같았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예배 후 교인들이 다음 주엔 다른 설교를 해달라고 건의했습니다. 그다음 주일, 설교단에 선 그 노사도는 그렇게 설교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것은 우리 주님의 명령이니라.’ 그의 설교는 짧아졌지만 메시지는 더 뚜렷했습니다.
• 우리가 사랑할 날은 얼마나 남았을까
김재진 시인의 에세이 집,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는 우리의 남은 시간을 생각하게 만들고, 그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혼을 바쳐 사랑하고픈 누군가를 떠올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죽어도 용서 못 할 어떤 사람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남은 날들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살기에 너무 바빠서, 무엇인가에 너무 매몰되어 있어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시간과 일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책에서 시인은 그렇게 말합니다.
“하루는 길지만 일주일은 짧고, 한 달이나 일 년은 그보다 더 짧게 느껴진다. 어느새 일 년이 가고, 어느새 인생의 시계가 황혼을 향해 움직일 때 정말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정말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또 누군가를 토닥거리며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마음 졸이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사랑할 수 있는 날이 내겐 정말 얼마나 남았을까?”
우리에겐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이 책 제목은 시인이 20년 전에 쓴 시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 시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남아 있는 시간은 얼마일까
아프지 않고
마음 졸이지도 않고
슬프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미워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외롭지 않고 지치지 않고
웃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까닭 없이 자꾸자꾸 눈물만 흐르는 밤
길에 서서 하염없이 하늘만 쳐다보네
걸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따뜻한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20년 전에 쓴 시를 다시 꺼내 책 제목으로 삼은 것은,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시인은 더 사랑하면서 살려고 노력했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사랑할 날은 얼마나 남았을까요? 그 물음 앞에서 초대교회 그 노 설교자는 다시 일어섭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성도들은 다시 일어섭니다. 그것이 우리 이야기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