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랑 이야긴 여전히 아름다워야 합니다
(아가 4:7-10, 16, 시 18:1-2, 요 21:17)
• 시인의 사랑 이야기
한때 우리도 누군가에게 한 아들이었고 딸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이제 누군가의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자라 누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얼마 전 출판된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라는 책에서 시인 정호승 씨가 한때 아버지의 아들이었다가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된 뒤에 썼다는 “아버지의 나이”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아버지는 숲의 아름다움과 강의 아름다움을 맛보게 하려고 어린 아들을 지게에 태우고 숲으로 갑니다. 강으로 갑니다. 어릴 적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보니 숲의 아름다움과 강의 아름다움을 어린 아들에게 맛보게 하려는 아버지의 사랑이었음을 나이가 들어서야 깨닫습니다.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와 아들의 감격을 시인은 그렇게 시에 담아냅니다.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 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 번씩 불러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시인은 이 시를 쓰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정호승 시인의 시에는 그의 어머니 이야기는 참 많이 나오지만 아버지 이야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2007년에 발간한 시집, 『포옹』(창비)에는 그의 부친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습니다. 한 평론가는 “병으로 허물어진 아버지, 아들의 시 속으로 들어왔다”라고 말하더군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당시 그의 부친의 나이는 88세였는데 노환으로 한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치매 예방을 위해 아버지는 아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일본어로 된 책을 번역 작업을 하셨는데 무리가 되어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답니다. 쓰러진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시인은 부모가 사는 집으로 작업실을 옮겼고, 거동이 불편하신 부친을 돌보면서 드디어 아버지는 아들의 시가 되었습니다. 시인은 아버지를 화장실에도 모시고 가고, 밥도 떠먹여 드리고, 목욕탕에도 모시고 가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 시집에 나오는 “노부부”라는 시에서 아버지는 배변도 어려울 정도로 나이가 드셨고, ‘나팔꽃’이라는 시에서는 나팔꽃 씨를 환약으로 알고 잡수시기도 했으며, ‘못’이라는 시에서는 인생의 힘든 무게를 견디다가 빠져나오면서 구부러진 못과 같이 되신 분이었습니다. 특별히 그 시집에 나오는 “못”이라는 시는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가 가득 채워져 있고, 그 사랑에 감격한 아들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벽에 박아두었던 못을 뺀다/
벽을 빠져 나오면서 못이 구부러진다/
구부러진 못을 그대로 둔다/
구부러진 못을 망치로 억지로 펴서/
다시 쾅쾅 벽에 못질하던 때가 있었으나/
구부러진 못의 병들고 녹슨 가슴을/
애써 헝겊으로 닦아놓는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늙은 아버지/
공중목욕탕으로 모시고 가서/
때밀이용 침상 위에 눕혀 놓는다/
구부러진 못이다 아버지도/
때밀이 청년이 벌거벗은 아버지를 펴려고 해도/
더 이상 펴지지 않는다/
아버지도 한때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
모든 무게를 견뎌냈으나/
벽을 빠져나오면서 그만/
구부러진 못이 되었다.”
아버지도 한때 잘 박혀있던 건장한 못이었습니다. 가족들을 위해 밤을 지세우고, 온갖 난관을 뚫고 달리던 강한 못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의 안위와 자녀 양육 등의 온갖 짐을 어깨에 걸머지고 애쓰다가, 이제는 녹이 슬었고 다시는 펴질 기약이 없는 구부러진 못이 되었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아들의 가슴 속에 아버지를 향한 사랑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아들이 이제 구부러진 못과 같이 된 아버지를 향한 자신의 사랑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 이야기는 다른 사랑 이야기를 만듭니다. 사랑 노래는 또 다른 사랑 노래를 만듭니다. 그렇게 사랑 이야기는 ‘이어지는 특성’을 갖습니다.
• 솔로몬의 사랑 이야기
오늘 우리는 본문 아가서에서 한 사랑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술람미 여인을 향한 솔로몬 왕의 순수한 사랑 노래입니다. 본래 아가서의 히브리어 표제는 쉬르 하쉬림인데 “노래들 중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표제처럼 아가서는 여러 편의 사랑 노래로 묶어져 있습니다. 이런 에로틱한 사랑 노래가 어떻게 성경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가서는 사랑 노래의 특성을 잘 알려줍니다. 한 사랑 이야기는 또 다른 사랑 이야기를 낳게 만드는 특성 말입니다. 아가서에 울려 퍼지는 솔로몬의 사랑 이야기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아가서를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노래로 이해했고 신약에 들어와서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아가서는 술람미 여인을 향한 왕의 사랑의 노래입니다. 누구나에게 그렇듯 사랑이 시작되면 그의 마음은 꽃피는 봄동산이 되고 아름다운 노래가 울려 퍼지게 되지요.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달리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내가 너를 사랑하였구나.” 왕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이름 없는 무명의 여인이었습니다. 아가서 여기저기에 설명이 조금씩 나오긴 하지만 그녀에 대한 정보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름도 나와 있지 않고, 어떤 가문의 여인인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1장에는 그녀에 대해 묘사하는 몇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1장 5절에는 그녀를 외모가 “게달의 장막 같았다”고 묘사합니다. 게달의 장막은 양과 염소의 가죽을 연결하여 만든 까맣고 볼품없는 유목민들의 텐트였습니다. 그의 거친 피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들에서 포도원을 가꾸고 양을 치던 여인이어서 외적으로 중동의 햇볕에 그을려 피부가 검고 아주 거칠어서 예루살렘의 왕궁의 있는 여인들과는 사뭇 달랐던 것 같습니다. 이런 여인이 어떻게 왕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의아함을 갖게 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왕은 그를 향해 그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2:1).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2:10). 오늘 말씀에 들어오면 그 사랑의 이야기는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구나.(4:1)” 이어지는 사랑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낯이 간지럽지만 아름답습니다. 조건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이야기는 이제 7절과 10절에 오면 정점에 이릅니다.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7) “내 누이 내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보다 진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더 향기롭구나”(10). 이거 완전 콩깍지 아닙니까?
이것이 사랑하는 여인을 향한 신랑의 사랑 노래였다면 그 사랑의 노래를 들은 신부가 화답하는 노래가 이어집니다. 16절입니다.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아가서는 한 사랑 노래가 울려 퍼지고 그 사랑을 받는 사람이 감격하여 자신의 사랑 노래를 부르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랑 이야기는 다른 사랑 이야기가 터져 나오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너도 이런 사랑 받았잖아? 그런 사랑 받는 너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데? 하늘의 놀라운 사랑 이야기를 들은 사람에게 이제 너의 사랑 이야기가 터져 나와야 한다고 재촉하는 것 같습니다.
• 하늘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
흔히 이야기에는 ‘미메시스 기능’이 있다고 하지요. 모사 기능, 본뜸 기능입니다. 사랑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를 낳습니다.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를 생각나게 만들어 줍니다. 아가서의 사랑 이야기는 우리 하나님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아들을 내놓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독생자를 내놓으신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 바로 성탄 사건이요, 십자가 사건이지요. 십자가의 보혈로 덮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장래에도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람을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줄을 세우신다면 제일 먼저 내보내셔야 할 사람이 저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로 감싸 안으셨습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그 사랑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부활사건에는 우리 주님의 그 사랑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릴 찾아오신 주님의 사랑 이야기는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몇 년 전 장신대 ‘해외석학초청 설교학 강좌’에 토론토대학교 설교학 교수인 폴 스캇 윌슨 박사가 초청받아 온 적이 있었습니다. 몇 차례의 강의와 학교 채플에서 설교가 있었습니다. 채플 설교 본문은 마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였습니다. 설교는 평범하게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설교 중간 부분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군요. “만약 예수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오셔서 양과 염소 편으로 나누신다면 장신대 채플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양의 편에 총장님이 계시나 보았더니 안 계셨습니다. 혹시 통역하는 김운용 교수가 있나 보았더니 김교수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염소 편에서 와글와글하고 있었습니다....” 이 양반 비싼 돈 들여서 초청했더니 실수하고 있었습니다. (반주자/ “그 사랑 얼마나” 찬양 반주 시작) ‘양의 편에는 딱 한사람이 서있는데 자세히 보았더니 그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와글대는 염소 편으로 다가오셨습니다. 뿔도 달려 있고, 뒷발질도 잘하고, 성질도 못된 완전 염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이 입고 있던 양의 옷을 벗어서 염소에게 입혀 주시고는 ‘너는 이제부터 양이다...’ 저는 그 부분을 통역하다가 울었습니다. 설교를 하다가 종종 우는 일이 있지만 통역하다가 울어본 적으로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는 도무지 사랑할 수 없었던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스러운 모습도 아니요, 조건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도무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고, 성립될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를 정말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전부를 내놓으셨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습니까? 그 사랑을 받고서도 오늘도 방황하고 있는 나를 변함없이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조용히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외면하고 있는 우리에게 사랑의 눈길로 덮으십니다. 오늘 그늘지고, 춥고, 답답하고, 외롭고, 상처투성이인 주름진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사랑의 햇살을 비춰주십니다. 그 놀라운 사랑을 받고 우리가 지금 여기에 서 있습니다. (찬양 시작)“...그 사랑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랑 얼마나 날 부요케 하는지/ 그 사랑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그 사랑 얼마나 나를 감격하게 하는지.”
이 사랑에 감격한 한 시인은 감격하여 한 편의 시를 쓰지요. 평생 섬진강 유역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시를 썼던 김용택 시인은 그 사랑을 그렇게 노래합니다.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
이 아름다운 사랑의 글귀를 남자 분들 안 써놓으셔도 괜찮겠습니까? ‘아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과 같은 글귀는 써놓으셨다가 생일 때, 결혼기념일에 카드에 적어 보낸다면 밥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텐데... 춥고 외롭고 응달지던 우리의 인생의 뒤란에 햇빛을 비춰주시고 사랑의 불가로 가만히 불러내 주신 주님, 그 좋으신 주님을 만나서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작은 섬김에도 들꽃처럼 웃으시는 주님 때문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아침,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너 그럴 줄 몰랐다. 어쩜 사람 새끼가 그럴 수가 있느냐? 나는 뒤통수치면서 배신하는 놈이 제일 싫더라. 나 솔직히 너에게 실망했다. 그래도 사람 새끼가 그렇지. 그렇게 무너진다는 것이 말이 되냐...?” 충분히 따질 만한 잘못을 한 제자입니다. 그런데 책임추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과 부활의 축복을 다시 그에게 덧입혀 주셨습니다. 그 제자를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말없이 지켜보는 제자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가슴에 채워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감격하는 제자에게 한 가지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부활의 아침 상처투성이인 베드로에게는 사랑스러운 모습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없이 그를 품에 다시 안으십니다. 상처투성이인 그의 멍든 가슴을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지셨습니다. 주님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신 후에 그에게 또 물으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사랑 이야기로 감격한 그가 주님을 향한 사랑 이야기로 가득했을 때 그는 죽는 자리까지도 아름답게 달릴 수 있었습니다. 섬길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 사람들의 가슴에는 그 사랑 이야기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이 대단한 조건을 갖추었고 세상적으로 대단한 사람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가슴에 사랑 이야기가 가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걸고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면 쉬워집니다.
• 이젠 우리 차례입니다
사랑하면 쉬워집니다. 사랑하면 할 수 없는 일도 가능해집니다. 사랑하면 거리도, 시간 없는 것도, 거리가 먼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박용재 시인의 말이 옳습니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저 향기로운 꽃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저 아름다운 목소리의 새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숲을 온통 싱그러움으로 만드는 나무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을 사랑한 만큼 산다/
외로움에 젖은 낮달을 사랑한 만큼 산다/
밤하늘의 별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그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만큼이 인생이다.”
사랑한 만큼 삽니다. 그만큼이 우리 인생이고, 그만큼이 우리 신앙생활입니다. 사랑 이야기는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은 전부를 주셔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사랑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씁니다. 주일을 지키면서,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 미소 지으실 정말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이야기를 써가는 것입니다. 대충 쓰는 사람도 있고, 적당하게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사랑 이야기를 쓰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사랑 이야기를 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충 쓰는 사람도 있구요, 아무렇게나 휘갈기듯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라면 우리의 최고의 정성이 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렇게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멋지게 쓰면서 교회를 세웠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본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승리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모든 일이 잘되고, 잘 살았기 때문일까요? 많이 배웠기 때문이었을까요? 종말론적 자세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오늘이 마지막 예배인 것처럼, 오늘 만나는 사람이 마지막인 것처럼, 오늘 드리는 찬양이 마지막인 것처럼, 올 한해가 마지막인 것처럼 그렇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올해가 내 인생의 마지막 해입니다. 이 예배가 마지막 예배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예배할까요? 최선을 다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승리할 수 있었고,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겼고, 아름다운 교회로 세웠습니다. 우리 사랑 이야기도 정말 잘 써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평생 갚아도 깊을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것은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진해의 한 교회 집회를 인도하던 중에 저는 잠시 마산에 있는 호주 선교 기념관을 찾을 적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의 이 땅에서 울려 퍼졌던 사랑 노래를 다시 듣고 싶어서였습니다. 127년 전 4월, 한국 땅에서 그의 마지막 사랑 노래를 힘껏 부르고 세상을 떠난 그의 사랑 노래를 다시 들으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는 누이 메리 데이비스 선교사와 함께 고향 멜본을 떠나 시드니에서 증기선을 타고 1889년 8월 28일 시드니 항을 떠났습니다. 40여 일간의 길고도 지루한 항해 끝에 1889년 10월 2일 부산항에 입항하였습니다. 한국에 온 최초의 호주 선교사였습니다.
먼저 온 미국 선교사들의 배려로 서울에서 수개월 간의 적응과 언어훈련 기간을 보냈습니다. 6개월 정도 한국말을 배우고 난 후에 빨리 한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해 1890년 3월 14일, 어학 선생 1명과 조사 1명을 동반하고 자신에게 배정된 선교지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과천 고개를 넘고, 수원을 지나 경기도 지방을 답사하고 공주 등의 충청도 지방을 거쳐 470km가 넘는 먼길을 걸어서 20여 일만에 도착했습니다. 4월 4일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날, 부산에 도착했을 때 그의 건강이 어려웠습니다. 무리한 도보여행으로 여행으로 몸은 쇠약해질 때로 쇠약해졌고, 오는 길에 천연두에 걸렸고 비를 맞아 폐렴이 겹쳐 마지막 5일간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에서 걸었습니다.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도움으로 일본인 의사의 치료를 잠시 받았지만 4월 5일 오후 1시경에 눈을 감습니다. 한국에 온 지 정확히 183일 만이었습니다. 33살의 젊은 나이의 미혼이었습니다. 그는 부산 초량 언덕에 묻혔고 그 지역이 개발되면서 무심은 유실되고 말았습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주님과 이 땅을 향한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그의 죽음의 이야기가 호주에 전해졌을 때 호주교회의 한국선교 개척은 중단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함께 내한했던 누이 메리 선교사도 동생을 잃은 슬픔과 건강악화로 인해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로써 호주교회의 한국선교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데이비스의 죽음 소식이 호주교회에 전해졌을 때 그 사랑 이야기를 계속 써가겠다고 나선 수많은 젊은이가 나섰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 땅에 건너온 선교사가 12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의 사랑 이야기는 짧았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달려왔으나 그는 크게 이룬 것도 없이 짧은 시간을 살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땅에서 불렀던 그의 사랑 이야기는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그의 놀라운 사랑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들이 일어나 조선 땅으로 달려왔고 척박한 땅에서 그들의 사랑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노래로 부산 땅을 덮었고, 김해, 창원, 마산, 진해, 거제, 함양, 거창, 진주, 통영, 의령, 밀양, 양산 땅을 덮었습니다. 1900년도 초기에 이 지역에 세워진 대부분 교회는 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세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 이야기는 이어져야 합니다.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의 사랑 노래는 이어져야 합니다. 우린 지금까지 주님을 향한 우리 사랑 이야기를 써왔습니다. 우리 사랑 이야긴 여전히 아름다워야 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아름답게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도 고백할 수 있을까요?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 찬송을 작사한 분은 미국 장로교 목사의 아내였습니다. 몸이 약하여 많은 시간을 누워지내야 했지만, 하나님께서 가정에 귀한 자녀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자녀들이 그녀에게 큰 행복의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유행하던 전염병에 두 아이가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 충성하며 살려고 노력했는데 가정에 임한 큰 아픔 때문에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의 순간에 “More love to Thee, O Christ, More love to Thee...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인생의 아픔의 순간에도 주님을 신뢰하기에, 사랑하기에 주님을 더욱 사랑하면서 살려고 발버둥쳤습니다. 나중 이것은 찬송으로 만들어져서 많은 그리스도인의 몸부림이 되었습니다. 미국 유니온신학교 설교학 교수가 되었던 조오지 프렌티스(George L. Prentiss)의 아내 엘리자베스 프렌티스(Elizabeth P. Prentiss, 1818-1878)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고백할 수 있을까요?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More love to Thee, O Christ, More love to Th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