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죽고 날로 새로워지는 신앙
(시 96:2, 고전 15: 31-34, 고후 4:16, 눅 9:22-27)
I. 서론
올해는 한민족에게 역사적 의의가 있는 3.1독립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따라서 한국사회 전체, 특히 학계가 이에 대하여 관심을 많이 보였습니다. 3.1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한 한국교회도 한국사회와 마찬가지로 이를 기념하는 일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사건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사건들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설교에 앞서 본 설교의 주제와 관련된 두 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올해는 1519년 종교개혁의 이정표가 되는 라이프치히 논쟁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517년 비텐베르크 성당의 95개 조항 게시 사건이 종교개혁의 계기가 되었다면, 1519년 라이프치히 논쟁은 종교개혁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건이 되게 했습니다. 1517년 사건이 종교개혁에 대해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면, 1519년 사건은 종교개혁의 핵심적인 교리를 확정하게 되었습니다. 즉 ‘오직 성경’라는 교리가 형성되었고, 이에 따라 우리가 잘 아는 오직 표어들 즉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등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의 전통과 연결되면서,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후스를 거론하면서, 우리는 후스파라고 천명하였습니다. 개혁이 이어져나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올해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로 상징되는 동구공산권의 붕괴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1917년 러시아혁명을 통해, 그 이전에는 이념에 머물렀지만 이제 공산주의를 국시로 하는 국가가 나왔습니다. 당시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세계적인 실험을 시도한 셈인데, 불과 70여년 만에 즉 겨우 두 세대 남짓한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물론 아직도 공산주의를 고수하는 국가가 있기는 합니다. 새로운 실험도 개혁이 이어져나가지 못하자,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개혁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는 사람들인데, 부활신앙은 바로 새로움의 신앙이고, 개혁의 신앙입니다. 한국에 개신교 신앙이 도입된 지 백여 년이 되었습니다. 사실 2년 전에 대대적으로 종교개혁을 기념했지만, 그동안도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에 대해 이런저런 관심을 보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종교개혁 400주년이 되던 해인 1917년, 한국의 대문호요 기독교를 잘 아는 이광수가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광수는 1917년 봄에는 한국교회의 기여도 언급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1917년 가을에 한국교회를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그의 비판은 요약하면 네 가지입니다. 교회가 미신적인 신앙을 지녔다, 너무 교회 중심적이다, 계급적이다, 그리고 목회자가 무식하다. 모두 일리 있는 지적이었습니다. 개신교 도입 초기 개혁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던 한국교회로서는 당황스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는 이런 문제들을 탈피했습니까? 한때 개혁의 주체였던 한국교회가 오늘날 개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한국사회를 걱정하고 희망을 제공했던 한국교회가 오늘날 한국사회의 걱정거리로 전락했습니다.
II. 본론
우리는 오늘 ‘날마다 죽고 날로 새로워지는 신앙’이란 제하의 설교에서 개혁의 신앙에 대하여, 새로움의 신앙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고 잘 기억할 수 있도록, ‘개신교’라는 단어를 셋으로 나눠서 ‘개’, ‘신’, ‘교’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새로워집시다. 날마다 새로워집시다. 다함께 새로워집시다.
1. ‘개’(改)
우리는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새로움을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창조자는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곧 무로부터의 창조는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새로움은 창조를 통한 새로움이 아니라, 개혁을 통한 새로움입니다. 창조된 세계는 세월이 갈수록, 후패해지고 노화되고 경직되다가 결국 죽음에 이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개혁하지 않는 한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 자신을 봅시다. 나는 어제의 나요 오늘의 나요 또한 내일의 나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닙니다. 나라는 정체성, 나라는 전체는 여전하지만, 내가 유지되기 위해서 나를 구성하는 세포가 끊임없이 죽고 다시 생성됩니다. 이런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고 완만하게 이뤄져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런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가지 못해 죽고 맙니다. 나를 나 되게 하는 것은 내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개혁의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나의 육체도 이렇다면, 하물며 나의 정신, 나의 영혼은 어떠해야 합니까?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개혁이 이뤄지지 않을 때가 많고,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가령 우리는 교회에 오면서도 개혁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며, 그래서 교회가 세상 가운데 특히 길 가에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인들이 세상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채 교회에 쉽게 쑥 들어오고 설교나 교육의 내용도 자기 위주로 취사선택하면서, 전혀 변화가 이뤄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세상 생각을 가지고 왔다가 변화 받지 못하고 다시 세상 생각을 가져가는 셈입니다. 그렇게 되니 신자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하나님 정신, 예수님 정신이 아니라 세상 생각입니다. 그러면 신자가 하늘 백성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개혁이 가능한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래서 개혁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선행되고 계속되어야 합니다.
2. ‘신’(新)
그렇다면 어떻게 개혁할 수 있고,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습니까? 성경은 이에 대해 두 가지로 가르쳐줍니다. 첫째,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항상 새로움입니다. 둘째,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점점 새로움입니다.
먼저 날마다 새로움을 살펴보겠습니다. 개혁을 시도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그러나 성공하는 개혁, 지속되는 개혁은 드뭅니다. 개혁을 시도했다고 해서 다가 아닙니다. 개혁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계속해서, 날마다, 항상 개혁이 이뤄져야합니다. 이점에 착안한 종교개혁의 모토가 있는데, 바로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만 한다’(Reformata ecclesia est semper reformanda)입니다.
둘째, 날로 새로움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갈수록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신앙의 비밀이요 비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날로 후패해지지만, 속으로는 날로 새롭습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도 새롭게 봐야 합니다. 흔히 교회가 역사가 오래 되면 교회사를 씁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교회사는 ‘과거로부터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신앙적 교회사는 ‘미래로부터의 역사’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런 식으로 실제 역사를 기록하기란 어렵지만, 적어도 정신적으로 그런 역사관을 지녀야 합니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천국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목표인 천국의 관점에서 오늘날 교회를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기준이 세상적인 기준 가령 크기, 재정 규모, 교인 성향, 교회 사역 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얼마나 하늘을 닮았는지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교인들에게 천국의 관점에서 세상을 살라고 권고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영원히 살아가야 할 천국에서 사는 것처럼, 이 땅에서 그런 모습으로 그런 관점으로 그런 기준으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를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교회에서 가장 새로운 사람은 오래된 교인, 먼저 나온 교인이어야 합니다. 노인이 젊은이보다 더 새로워야 합니다. 이것이 이뤄지지 못해서, 교회가 개혁이 안 되고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것입니다.
3. ‘교’(敎)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되, 교회를 이뤄 믿도록 하셨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혼자 믿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어려운데, 이것이 신앙에도 영향을 미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혼자 믿는 믿음은 허위의식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갈이 마찰을 통해 원만한 조약돌이 되듯이, 교회 생활을 통해 원만하고 성숙한 교인이 됩니다. 자기가 자기를 볼 때, 괜찮은 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이 착각이요 오해일 경우가 많습니다.
더구나 교인은 교회를 통해 천국의 사상을 배우고 심화할 수 있습니다. 개개인으로서는 세상 생각에 지배될 수 있지만, 천국의 사상을 실험하고 실천하는 교회에 있는 가운데, 교인이 천국 백성으로 개발되고 발전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천국을 시식하는 곳입니다. 먼저 교인들이 이것을 시식하고 이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고, 나아가서 이웃들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가리키는 용어로 교회(交會)와 교회(敎會)가 있습니다. 전자는 모임을 강조하고, 후자는 가르침과 모임을 동시에 강조합니다.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후자를 사용합니다. 교회는 천국을 분명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특히 개혁은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종말론적 공동체요, 개혁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을 돌아봐도 동료들이 개혁을 함께 이뤘습니다. 가령 루터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종교개혁의 과거의 관점에서 보면, 루터는 위에서 언급한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자들 곧 종교개혁의 선구자의 전통 위에 자신을 자리매김했습니다. 또한 종교개혁의 당대의 관점에서 보면, 루터는 멜랑히톤 같은 동료와 공동으로 종교개혁을 수행해나갔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미래의 관점에서 보면, 루터의 노력이 점차 쇠퇴해갈 때, 루터교의 후예들이 종교개혁을 다시 개혁하는 경건주의를 일으키면서 개혁을 이어나갔습니다. 교회가 개혁공동체가 된 사례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이와 같은 개혁공동체로서의 면모를 회복하고 유지하고 확산해나가야 합니다.
종교개혁이 비판했던 가톨릭교회도 당시 개혁을 통해 쇄신하여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개신교가 보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지만, 여하튼 개혁할 때 미래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이런 자기개혁에 자족하면서 500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다가, 20세기 말 제2차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다시금 개혁의 기회를 가졌고, 쇄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이런 개혁에 대한 내부적 저항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함께 개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하튼 오늘날 이런 문제점들을 극복하면서 과감한 개혁을 이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면서 출현했던 개신교가 오늘날 개혁의 대상으로 거론되는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개혁이 희망입니다. 새로움이 희망입니다. 새로워지십시오. 날마다 새로워지십시오. 다함께 새로워지십시오.
III. 결론
갈릴리교회는 유명한 교회, 역사적 의의가 있는 교회, 훌륭한 유산이 있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릴리교회를 들어 쓰셨고, 오늘도 갈릴리교회를 기억하시고 사랑하심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과거보다 중요한 게 미래입니다. 전통보다 중요한 것이 개혁입니다. 훌륭한 과거도 위대한 현재도 미래와 연결되지 못하면, 족쇄가 되고 유혹이 됩니다. 과거에 머물고 현재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미래를 향해, 개혁을 향해, 새로움을 향해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새로워지십시오. 날마다 새로워지십시오. 다함께 새로워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