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지...
(신 5:16, 6:6-9, 엡 6:1-4, 막 7:9-13)
• 새로운 삶의 방식
참 아름다운 계절을 살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피천득 시인은 푸른 오월을 살면서 그렇게 노래합니다. (화면)“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이다.../ 신록을 바라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구순을 넘은 나이에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푸른 오월 속에 있다.”
팔순이 넘어 쓴 시에서 박두진 시인은 푸른 오월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화면)“...볕 포근히 쏘이고 푸른 나뭇잎 하늘대고/ 하늘대는 잎 사이, 여기저기 붉게 피는 꽃 무더기/ 오월은, 재재대는, 적은 새의 떼와 더불어/ 푸른 호숫가로, 호숫가로, 어울리는데/ 당신은, 오월, 이, 부드러운 바람에도 안 설렙니까...” 시인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오월, 이, 부드러운 바람에도 안 설렙니까?” 설렘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죽어버리기 때문이지요.
어떤 유대인이 심산유곡 깎아지른 절벽에 줄을 설치하여 만든 위험해 보이는 출렁다리 위를 조심스럽게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어오니 이리 저리가 흔들리는데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하나님, 아무 탈 없이 무사히 건너가게 해주시면 이번 안식일에 1,000불을 헌금으로 드리겠습니다.” 기도 덕분인지 바람도 좀 잦아들었고 무사히 다리를 다 건널 때쯤 되자 본전 생각이 나서 다시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무래도 아까 말씀드린 1,000불은 너무 많은 것 같네요. 요즘 장사도 잘 안되고 어려운 것, 하나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절반으로 하든지, 아니면 없었던 일로 그냥 눈감아 주시면 안 될까요? 아무 말씀이 없으시면 그냥 눈감아 주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다리가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깜짝 놀라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아이고, 하나님, 농담도 못 합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내 기분대로, 생각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 따라, 형편 따라, 유행 따라 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거기에 걸맞은 삶의 원리(principle)가 있습니다. 출애굽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새로운 삶의 원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주신 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사실 성경의 66권 전체의 원저자가 하나님이시지만 성경 말씀 중에서도 하나님이 직접, 두 번씩이나 기록해 준 말씀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중요한 계명이어서 출애굽기와 오늘 신명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는지를 밝혀준 다음,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지 계명들이 제시됩니다. 첫 번째부터 네 번째 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원리라면 다섯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삶의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화면)에베소서도 이런 구조를 취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지,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었고, 어떻게 새로운 존재가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전반부 1-3장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면, 후반부 4-6장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존재가 되었고, 그분을 섬기는 삶을 살기로 작정했다면 그분이 원하시는 삶의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가정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 자녀들아 네 부모를
오늘 서신서의 말씀은 “자녀들아”라는 호격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렇게 부른 다음에 명령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네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그 명령 이후에는 “이것이 옳으니라.”라는 말씀을 첨가하여 그 중요성을 확인하면서 그것은 보편적 원칙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순종’이라는 단어와 ‘공경’이라는 단어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 두 행동은 상호 연관성을 갖습니다. 순종할 때 공경할 수 있고, 공경할 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에 대한 자녀들의 의무를 담고 있는 명령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께서 그것을 명하셨기 때문이다. 주를 위하여, 주를 바라고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 명령과 연결하여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명령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다는 뜻이며, 오늘 말씀은 그 첫 번째에 해당하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약속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명예와 인격이 걸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과 함께 약속하시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화면)예컨대 마 28장에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명령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에는 약속의 말씀이 함께 주어집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오늘 말씀에도 명령이 주어집니다. “자녀들아 네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그리고 약속이 주어집니다.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출애굽기의 말씀을 이 약속을 더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들에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이고,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암시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명령하십니다.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화면)여기에서 사용된 ‘순종하라’의 헬라어 동사 ‘휘파쿠오’(ὑπακούω)는 ‘아래에, 곁에’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휘포(ὑπο)와 ‘듣다, 귀 기울이다’의 뜻을 가진 ‘아쿠오’(ακούω)가 합성된 단어로 ‘아래에서 듣다, 주의 깊게 듣고 따르다, 명령에 귀 기울이다, 유의하여 순종하다’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공경하라’로 번역된 헬라어 ‘티마오’(τιμάω)는 ‘높이 평가하다, 가치를 두다, 존경하다’ 등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이것의 어원인 구약의 히브리어는 ‘카바드’(כבד)인데 하나님의 성전과 말씀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귀하게 여기라는 명령은 네 마음의 성전을 삼아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 명령과 약속이 주어지면서 한 단어로 연결됩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그 단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만 헬라어 원어에는 “왜냐하면”이라는 뜻의 “가르”가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번역하면 “왜냐하면 이것이 옳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도리이고, 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부모가 없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 사랑 때문에 오늘의 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버이 주일을 보낼 때면 한번은 꺼내서 읽는 시가 있습니다. 임병연 시인의 “참꽃”이라는 시입니다. (화면)“어느새 봄이/ 익어가고 있는가 봅니다/ 아침에 산에 올라/ 활짝 핀 참꽃을 보았습니다// 문득/ 어릴 적 봄날/ 먼 산에 나물을 뜯으러 가셨다가/ 한 묶음 참꽃을 꺾어 오시던 어머니/ 커다란 나뭇짐 위에/ 한 아름 참꽃을 꽂아 오시던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어머니, 아버지!/ 지금쯤 무덤가에도 참꽃이 피었겠지요?” 시인이 노래하는 것처럼 부모님은 ‘내 인생에 참꽃을 꽂아주신 분’들입니다. 뭐라고 해도 오늘의 내가 있게 해 주신 분들입니다. 그 근원을 알지 못하고, 그 은혜를 알지 못하고서는 어떻게 하나님 백성답게 살 수 있겠습니까?
3-4대가 어울려 살던 과거에는 자연히 부모 모시고 살았고, 어른 공경하면서 살았으나, 핵가족 시대가 되면서 가족구조도, 관계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가 되면서 어른이 없어졌고, 나이든 부모를 귀히 여기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십계명 중 부모 공경의 계명인 5계명을 “텅빈 계명, 잊어진 계명”이라고 지칭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4,000년 전 십계명이 주어지던 모세 시대에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을 섬기는 2,000년 전의 초대교회에도,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신 명령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복음서의 말씀은 다른 핑계를 대면서 이것을 소홀히 하는 것을 엄중히 경고합니다. 그것이 심지어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핑계로 소홀히 하는 것까지 지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 풍조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가족의 구조가 바뀌고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명령은 유효하다는 말씀이지요.
“어느 어머니의 일기”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병든 어머니를 돌볼 수가 없어 요양원에 모시게 된 아들이 마음 다칠까 봐 걱정되어 쓴 글인 것 같습니다. (화면)“미안하구나, 아들아. 그저 늙으면 죽어야 하는 것인데... 모진 목숨 병든 몸으로 살아 네게 짐이 되는구나. 여기 사는 것으로도 나는 족하다. 그렇게 일찍 네 애비만 여의지 않았더라도 땅 한 평 남겨 줄 형편은 되었을 터인데, 못나고 못 배운 주변머리로 짐 같은 가난만 물려주었구나... 어지러운 아파트 꼭대기에서 새처럼 갇혀 사느니 친구도 있고 흙도 있는 여기가 그래도 나는 족하다. 내 평생, 네 행복 하나만을 바라고 살았거늘 말라비틀어진 젖가슴 파고들던 손주 녀석 보고픈 것쯤이야, 마음 한번 삭여 참고 말지. 혹여 어미 혼자 버려두었다고 마음 다치지 마라. 네 녀석 착하디착한 심사로 어미 걱정에 마음 다칠까 걱정이다. 삼시 세끼 잘 먹고 약도 잘 먹고 있으니 어미 걱정일랑은 아예 말고 네 몸 건사 잘하거라. 살아생전에 네가 가난 떨치고 사는 것,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은 없다...”
이런 사랑 받고 오늘에 이르렀는데 그 사랑을 잊고 산다면 어찌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피 서말 쏟아 낳아 키운 부모, 자식의 물 한잔 효도에도 감동하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화면)“한 부모는 열 자녀를 아무 부담 없이 키우는데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모시지 못하는 일들이 있으니 자녀와 부모를 대하는 마음이 어찌 그리 다른가?” 『명심보감』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병원에 걸린 “효도테스트”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몇 가지나 ‘예’라고 대답을 할 수 있는지 한번 체크 해 볼까요? (화면)1) 부모님 생신을 알고 있다. 그리고 기억하고 대접한다. 2) 부모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음식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3) 부모님의 취미생활을 알고 있다. 4) 부모님에게 종종 ‘사랑한다’라고 말씀드린다. 5) 하루 한 번 이상은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한다. 6) 부모님께 작은 것이라고 종종 부모님께 선물을 드린다. 7) 부모님을 업어드린 적이 있다. 8) 부모님을 업는 순간에 뭔가 느껴졌다. 9) 맛있는 음식이나 멋진 볼거리를 보면 부모님 생각이 난다. 10) 나는 솔직히 말해서 효자, 효녀인 것 같다.
몇 가지나 해당하는 것 같습니까? 많은 분이 ‘난 효자, 효녀가 맞네’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밑에 그런 글이 덧붙여 있었습니다. “나는 ‘역시 효자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대부분 효자가 아닌 경우가 많다. 아홉 개 이상을 예라고 하는 사람은 효자, 효녀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네 개나 여덟 개 사이에 예라고 했다면 좀 더 노력해야 한다. 세 개 미만은 지금 빨리 부모님에게 달려가서 죄송하다고 용서를 빌고 개과천선해야 한다.”
• 내일이 아니라 오늘
가까이 있어 부모를 효도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멀리 있어서 효도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 공경은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일에 바쁘고, 돈 버는 일이 바쁘고, 자식 키우는 일이 중요해도, 아직 부모님이 살아계신 분들이 계신다면 모든 것 다 주시고 이제는 외로움과 긴 기다림 속에서 사시는 분들임을 기억하십시다. 중요한 것은 부모를 공경할 시간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할 기회는 내일이 아니고 바로 ‘오늘’이고, ‘지금’입니다. 삶에 여유도 좀 생기고 용돈이라도 드릴 여유가 생겼는데 부모님은 이 땅에 이제 계시지 않습니다. 고향에 찾아가면 버선 바람으로 뛰어나오시던 분들도 산소를 찾아가도 이젠 한마디 말씀도 없으십니다.
저도 어버이 주일이면 늘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외국에 나가 공부한다고 긴 기다림 속에서 살게 하시다가 어머니를 그렇게 떠나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저를 기다리셨다는데 쓰러지셨다는 소식 듣고 비행기 표를 못 구해 며칠 지체하다가 먼 길 달려왔을 땐 어머니는 미소 짓고 계시는 영정으로 저를 맞으셨습니다.
고등학교 국어교사인 최상호 시인은 그의 시에서 그렇게 노래합니다. (화면)“하이얀 꽃 석죽꽃 가슴에 피웁니다/ 뭄 약한 우리 막내 그저 다만 면서기나 되었으면/ 하늘님 도우셔서 학교 선생님 되었으면/ 타성바니 눈총 속에 입술만 늘 애닯더니/ 유언보다 더 사무치는 그 선생님 되어/ 아픈 오늘 보냅니다.” 어버이 주일이면 한 번씩 이 시를 꺼내 읽다가 울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결국은 그냥 눈가에 눈물이 맺힙니다. 가난하고 가슴 시리던 날,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 위한 바람 가지고 그렇게 고생하시며 평생을 사셨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아들이 선생이 되어 당신이 체험한 그 모진 가난은 안고 살지 않았으면 하고 늘 입술에 담고 사셨고 무릎 닳는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응답 되지 않았습니다. 사범대학 갈 준비하던 아들이 고 2 때 목회자 소명을 받고 신학대학으로 진학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목회가 좋아 목사가 된 아들이 담임목회 하다가 지도교수의 강권에 못이겨 뒤늦게 유학을 다녀온 다음에 신학대학 강단에서 가르치는 선생 되었습니다. 학교 선생 되어 서던 날, 어머니의 기도가 생각나 저는 울었습니다. 시인의 그 아픔, “아픈 오늘 보냅니다”라는 그 마음이 제게도 있습니다.
• 이제 네가 받은 사랑을 네 자녀에게 주어라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사랑으로 오늘 우리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 사랑을 깊이 생각하는 주일에, 순종하고 싶고, 공경하고 싶고, 효도도 하고 싶은데 이 땅에 계시지 않아 이제는 이 땅에 안 계셔서 눈물로, 그리움으로 보내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어느 사려 깊은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면서 이런 아름다운 글을 남겼습니다. (화면)“내가 죽었을 때/ 내가 남긴 것들을 네 아이에게 주어라/ 울어야 하거든/ 네 곁에 걷고 있는 형제를 위해서 울라/ 너의 두 팔을 들어 누구든지 껴안고/ 내게 주고 싶은 것들을 그들에게 주어라/ 난 너에게 무엇인가 남기고 싶다/ 말이나 소리보다 더 값진 어떤 것을/ 내가 알았던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속에서 나를 찾아라/ (화면)...나로 하여금 너의 눈, 너의 마음, 너의 친절한 행동 속에서 살게 하라/ 너의 손으로 다른 손들을 잡고/ 자유로울 필요가 있는 아이들에게 자유를 줄 때/ 사랑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줄 때/ 너는 나를 가장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죽지 않지/ 사람들도 그렇고/ 따라서 내가 너에게 남기는 것은 오직 사랑 뿐.../ 내 사랑을 모두에게 주어라.”
혹 부모님이 가셨더라도 안타까워만 말고, 울지만 말고, 네 자녀에게 그 사랑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좋은 부모로서 자녀를 양육하고, 부모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그들을 사랑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위해서 기도하는 좋은 신앙의 부모가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명령 후에 바로 “아비들아”라는 명령으로 나타납니다. “아비들아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여기에서 “아비들아”라는 표현은 대표성을 담은 용어여서 “부모들아”로 바꾸어서 이해해도 별문제가 없는 표현입니다.
부모 된 사람들에게는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할 책무가 주어졌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 가치관으로 키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것 먹이고, 좋은 대학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로, 하나님의 백성들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자녀의 구원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하고, 자녀를 신앙인으로, 예배자로 키우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영국의 전도자 톰 리스는 영국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화면)14세 이전에 그리스도에게 돌아온 사람이 75%이고, 14-21세 사이에 돌아온 사람이 20%, 그리고 21세 이후에 돌아온 사람은 불과 5%밖에 되지 않았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역시 라이오넬 헌트도 미국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내놓았는데, 15세 이하가 86%, 15-30세 사이가 10%, 그리고 30세 이후에 주님께 돌아온 사람은 오직 4%였습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 아이들의 나이가 몇 살입니까? 그냥 데리고 가기만 해도 86% 이상이 예수님을 만날 좋은 나이인데, 무관심 가운데 내버려고 두고 있습니까?
학원 한번 빠지면 큰일 나고, 시험 성적 떨어지면 큰일 난 것처럼 생각하지만 아이가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신앙을 소홀히 해도 마음에 안타까움이 없습니까? 이제는 돌아올 확률이 10%도 안 되는 때를 살고 있는데도 기도하지 않으십니까? 지옥 백성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그런데도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는 좋은 신앙의 부모는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수행하고 있는 부모는 아닙니다. 언제가 우리도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우리가 떠나고 난 다음 아이들은 우리 어떻게 기억할까요? 우리 엄마는 입만 열면, “공부, 공부, 공부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우리 아빠는 언제나 “돈, 돈, 돈만 알던 사람...” 자녀들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야 하는 것이 부모된 이들의 최고의 사명입니다.
(화면)이스라엘 홀로코스트 추모 기념관인 야드 바솀에는 (화면*2)“마지막 행진”(The Last March)라는 조각이 서 있습니다. 가스실로 끌려가던 아빠가, 엄마가 아이들을 품에 끌어안고 서 있습니다. 그런데 더는 함께 걸어갈 수 없는 길... 그래서 내 품에 품고 있던 아이들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영원히 내가 품을 수 없는 아이들... “주님, 이 아이들의 목자가 되어 주시옵소서. 이 아이들을 주님께 맡깁니다...” (화면)그리고 홀로 죽음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부모는 죽었습니다. 하나님 손에 맡겨진 그 아이가 아하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나왔습니다. 그리고 조각가가 되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떠올리며 만든 조각품입니다. 신앙교육은 자녀를 만왕의 왕이 되신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그 아이를 맡기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백성,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은 명령합니다. “부모들아, 네 자녀를 그리스도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지
오늘 신명기의 말씀은 모세가 인생 마지막 순간에 전한 고별 설교 가운데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렇게 살고, 이렇게 예배하고, 이렇게 자녀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이렇게 사역을 감당하라고 유언하듯 전해 주는 설교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숴마아 이스르엘(שמע ישראל)!’ 이스라엘아 들으라! 이렇게 시작된 말씀이 6절에서는 그렇게 이어집니다. (화면)“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는 이 계명을 여러분 마음에 새기십시오. 이 계명이 여러분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여러분 자녀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십시오.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어디에 있든지 이 계명에 관해 이야기 하십시오...” ‘들으라’는 뜻의 ‘숴마’라는 말은 ‘주목!’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여, 주목하십시오!” 흔히 쉐마 명령은 이스라엘의 교육의 근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자녀에게 믿음을 잘 전해주라는 명령으로만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자세히 보면 부모가 말씀 앞에 바로 서는 것이 먼저입니다. 부모가 먼저 믿음 위에 서지 않고서는 이 사명은 결코 성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이 캄캄한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 1901년 5월, 그리스도인이 한명이 없었고 유난히 복음이 적대적이었던 평양에 선교스테이션을 설치하고 자기 집 사랑방에 두 사람의 학생들을 불러다가 교육을 시작하였던 것이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전신인 평양장로회신학교였습니다. 이번 주간이 장로회신학대학교는 개교 118년을 맞으면서 감사예배, 국제학술대회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집니다. 작년 이때, 개교기념 행사 가운데 정지은 작가의 십자가 작품이 전시된 적이 있습니다. (화면)그중에서도 유난히 저의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어 몇 번을 가서 보았는데, “통곡하는 여인”이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이었습니다. 한 여인이 십자가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있습니다. 머리를 땅에 대고 기도하는 여인의 무릎 앞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습니다. 채플 설교를 준비하며 묵상하고 있던 때인데 그런 음성이 마음에 들려왔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오늘 필요한 사람은 어려움 앞에서 함께 절망하고, 답답함 앞에서 함께 방황하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사람이 필요하단다. 어려움과 시련 앞에서 좌절하고 원망하고, 방황하는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눈물 젖은 푸른 오월의 들판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있는 사람, 하나님께 탄원하며 통곡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하단다. 그가 서 있을 때 교회도 세워지고, 가정도 세워지고, 사람들도 세워질 수 있단다....”
통곡하는 여인... 그 작품 앞에 설 때 몇 년 전, 신대원 3학년 필수과목인 ‘설교의 실제’ 과목을 진행할 때가 생각이 났습니다. 어떻게 하면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는가라고 묻는 학생의 질문에 그렇게 답한 적이 있습니다. “너무 설교 잘하려고 하지말고, 하나님의 말씀하심만 정확하게 전하려고 해라. 한가지 팁을 주면 교수를 울리면 그 설교자는 무조건 A+다...” 그런데 교수가 강퍅해서 웬만해서는 잘 안 울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교수를 울렸습니다.
학생의 할머니가 치매에 걸렸다고 했습니다. 팔순이 넘은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돌볼 수 없어서 도시에 나가 있는 자녀들이 순번을 전해서 일주일씩 할머니를 돌보게 되었답니다. 목회하시는 그 학생의 아버지가 언젠가 한 주간 어머니를 돌보게 되었답니다. 그 할머니는 자식들의 얼굴과 이름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결혼해서 60년을 함께 산 남편의 얼굴도 잊어버렸습니다. 평생 다니셨던 교회 가는 길도, 평생 일구었던 논밭에 가는 길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화면)어느 날 낮잠을 주무시던 어머니가 시계의 작은 바늘이 4자로 가고, 큰 바늘이 12자로 가자 벌떡 일어나더니 옷을 챙겨 입고 성경책을 들고 집을 나서시는 것입니다. 길을 잃으면 큰일 나는 것이라 “어머니, 어디 가시려구요?” 묻는 아들에게 “누구세요?”라고 하더니 붙잡는 손을 뿌리치고 나가시더랍니다. 그래서 뒤따라 나섰는데 어머니는 종종 걸음으로 교회당으로 올라가시더랍니다. 작은 방석 하나 들고 강대상 앞에 엎드리시더니 9남매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손자 손녀의 이름까지 하나하나 불러가며 기도하시더랍니다. 그 눈물의 기도는 한 시간이 넘게 이어졌습니다. 가정 구원, 동네 복음화를 위해 기도할 때는 통곡의 기도로 바뀌더랍니다.
그 설교자는 자기 할머니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의 성함을 알고 있습니다. 박광례 권사님... 그분은 저의 고향교회의 권사님이셨고, 제 어머니의 기도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의 기도를 먹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116년 전에 지나가시던 선교사님이 저의 고향 마을에서 하루 저녁 머물게 되면서 한 가정이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6-7개의 마을 중심에 교회가 있습니다. 그 이후 다른 마을들은 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바닷가에 위치했던 저의 고향 마을은 우상과 미신이 성하여 복음화율이 가장 낮았습니다. 어린아이들만 몇 명과 여자분들 몇 명만 교회 다녔지만 남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엎드리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새벽마다 엎드려 가족 구원을 위해, 마을의 복음화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우리 마을에서도 장로님도 나오게 해 주시고, 집사님도 나오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그 동네에서는 처음으로 한 젊은이가 장신대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장신대 학장을 지내신 맹용길 박사가 장신대 입학한 지 20여년 만에 생긴 일이니 경사가 난 것입니다. 방학이 되어 내려오면 그 권사님은 “우리 목사님, 우리 목사님...” 그 학생을 부둥켜안고 눈물지으셨습니다. 겨우 신학공부 한 학기했는데 우리 목사님이랍니다. 기도의 열매 때문에 감격한 것이지요. 그 장신대 학생은 지금 목사가 되어서 오늘 설교하고 있습니다.
작년 겨울, 고향교회에 두 번째 집회 인도를 위해 갔을 때, 우리 마을에도 장로님이 나오게 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하던 그분들은 다 떠나셨지만 이제 그 마을 사람들이 교회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앞세대가 살아있으면 다음 세대는 세워집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