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05 발 씻기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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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씻기시는 예수님

(57:15, 벧전 5:6, 요한복음 13:1-15)

우리 몸의 여러 부분 중에서 별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 몸의 맨 밑바닥에서 온갖 고생은 다 하지만 영광은커녕 관심조차도 받지 못하는 것이 입니다. 입이나 코나 귀나 눈은 우리 얼굴에 모여 있고 다른 사람이 보는 부분이기 때문에 귀걸이도 하고, 립스틱도 바르고 눈 화장도 하고, 어떤 사람은 코도 세우고 아무튼 많이 꾸밉니다. 그런데 발은 그렇지 못합니다. 손하고 비교해도 손에는 예쁜 매니큐어도 하지만 발은 한다고 해도 손만큼은 신경을 안 씁니다. 손은 다른 사람이 꼭 잡아주기라도 하지만 발을 꼭 잡아주는 사람은 드뭅니다. 일을 하다가 잘 안 되면 발목을 잡혔다고 합니다. 손목을 잡혔다고 해도 될 것을 왜 발목을 잡혔다고 합니까? 이래저래 발은 고생만 하고 대우를 못 받는 것입니다. 그래도 요즈음에는 발이 건강해야 온몸이 건강해진다면서 발, 발목 전문 의사까지 등장해서 발의 위상이 다소 높아진 느낌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준 경험이 있는 분이 계십니까? 부부끼리, 부모님의, 자녀들의 발을 씻겨준 경험이 있습니까? 사실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지극한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긴 여인의 이야기는 바로 주님 사랑의 극치였습니다. 그 여인은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긴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주님의 발을 씻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겼다는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발을 씻긴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요한의 특별한 안목이 돋보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는 고난주간 목요일에 있었던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께서 떡을 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고 말씀하셨고, 잔을 주시면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다고 말씀하셨다고 기록 하였습니다(26:26-30; 14:22-26; 22:15-20). 다시 말하면 성만찬에 대해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성만찬이 아니라 세족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족식은 요한만이 기록한 것입니다. 요한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이 성만찬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왜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 사건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첫째로 그것은 주님이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13:1절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촛불은 꺼지기 전에 가장 밝게 빛을 발한다고 합니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날 때가 이른 줄 아시고 남은 사랑의 불꽃을 유감없이 태우시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말씀이 참으로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예수가 사랑을 불태운 것일까요 사랑이 예수를 불태운 것일까요? 그 분이 죽음을 앞두고 할 수 있는 일은 사랑하는 일밖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목마른 사람이 우물판다는 말이 있습니다. 절박한 사람이 먼저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애를 태워도 더 태우고, 발을 씻겨도 먼저 씻기게 마련인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의 발을 씻어주는 부모는 있지만, 부모들의 발을 씻어주는 자녀는 아마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저는 부모의 발은커녕 손도 씻겨드린 적이 없습니다. 옛 부터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있듯이 부모의 사랑이 자녀의 효성보다는 더 깊고 절박한 것입니다.

 

오늘이 마침 어린이날이고, 어린이주일입니다. 부모 되신 여러분, 할 수 있다면 자녀들의 발을 한번 씻겨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엄마는 혹은 아빠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 보십시오. 어쩌면 그 순간이 자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시간이 될지도 모릅니다. 자녀 되신 여러분, 이번 주 수요일이 어버이날인데 아직 부모님이 살아계신 분들은 굳게 결심을 한 후, 이건 보통 결심으로는 안 될 일이긴 하지만 정말 굳게 결심한 후 부모님들의 발을 씻겨 드리십시오. 어쩌면 얘가 못 먹을 것을 먹었나?” 하실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감격과 보람의 눈물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돌아가신 분들이라고 서운해 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주위를 돌아보시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들, 내가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발을 씻긴다는 것은 단순히 그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이 없이는 발을 씻길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발을 씻기셨다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끝까지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아무리 부모를 사랑해도 부모의 자녀 사랑에는 미치지 못하듯이, 내가 아무리 주님을 사랑해도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감히 알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까? 왜 온갖 모욕과 멸시와 천대를 참으신 것입니까? 왜 기꺼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까? 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까? 무엇보다도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의 성품을 닮아 나에게 주어진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지고,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고, 사랑하기 때문에 발까지라도 씻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 참된 주님의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둘째로 세족식은 주님처럼 우리도 겸손으로 섬겨야 함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있는 분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입니다. 목사고 전도사고 장로고 권사고 집사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닮고 따라가기를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을 닮아 있습니까? 주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우리 주님은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위해 왔다.”(10:45)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섬기기 위해서 섬기는 종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겼다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바로 섬기는 종으로 오신 주님을 가장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의 도로는 포장된 길이 아니라, 흙과 모래와 진흙으로 이루어진 형편없는 길이었습니다. 지금처럼 구두나 운동화를 신은 것이 아니라, 발가락이 나오는 샌들을 신었습니다. 운송수단은 차가 아니라, 말이나 나귀나 낙타였습니다. 흙과 모래와 진흙에 동물들의 배설물이 뒤섞여 반죽이 된 길을 슬리퍼만 신고 하루 종일 돌아다녔을 때, 그 발의 상태가 어떠했겠습니까? 더군다나 유대인들은 지금 우리들처럼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했으니 그 발의 위치가 어디쯤 있었을지도 상상해 보면 속이 좀 불편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어느 집에 식사를 하러 가게 되면 그 집에서 가장 천한 종이 손님들의 발을 씻어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 집에 종이 없었던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중 누구나 자신이 그 일을 하기는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지독한 냄새가 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딴전을 피우면서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 중 아무도 자신이 그렇게 천한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눈치를 보는 어정쩡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주님이 일어나시더니 갑자기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는 대야에 물을 담아 와서 허리를 숙여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둘렀다는 표현이 섬김이란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겉옷을 벗었다는 것은 자신의 권리와 특권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권위주의를 벗었다는 것입니다. “수건을 허리에 둘렀다는 것은 겸손한 자리에 앉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셨던 그 분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벗고 겸손과 섬김으로 육신을 입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발뿐만 아니라 목욕까지 시켜달라고 했던 베드로는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예수님의 모습을 아마 오랫동안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후에 베드로전서 5:5절에서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주님이 두르신 수건은 바로 겸손과 섬김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의 권위가 다스림이 아니라 섬김에서 나왔듯이 그리스도인의 권위도 섬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4-15)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아집과 독선과 자랑과 교만의 겉옷을 벗고, 겸손과 섬김의 수건을 허리에 둘러야 할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서로 누가 큰 자인지, 누가 높은 사람인지를 두고 다투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18:3-4)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큰 자이며 천국의 시민이라고 하십니다. 당시 어린 아이는 인원수를 계수할 때조차 포함되지 못하는 약자였으며, 자신의 뜻대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작은 자요 낮은 존재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처럼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의()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밖에 바랄 수 없는 겸손한 약자에게 허락된 나라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겸손히 자신을 낮추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기 의에 충만하여 자고하고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부디 여기에 계신 모든 성도님들은 겸손의 수건을 허리에 두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서신서 베드로전서 5:5-6절의 말씀입니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구약 이사야 57:15절의 말씀입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57:15)

 

동양의 현인인 노자의 글에 보면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착한 것은 물과 같다라는 의미입니다. 물은 가장 낮은 곳에 처하면서 만물을 이롭게 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바로 물과 같은 분이 아니셨는가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지만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서 사람이 되셨고 더욱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만인과 만물을 이롭게 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낮아지시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까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물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낮은 곳으로 가서 거기에 처하면서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겸손과 섬김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즈음만큼 설교하기가 힘이 든 때가 없는 것 같습니다. 목회자들이 사랑과 섬김보다 무익한 욕망과 명예를 따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조차도 세상의 풍조를 따라 알맹이보다는 껍데기에 시선을 빼앗기고, 본질보다는 형식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기본과 원칙보다는 편법과 효율성에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사랑과 섬김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할 기본적인 덕목이요 지켜야 할 본질이라고 믿습니다. 주님이 세족식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 그 겸손이 바로 우리의 기본이 되고 원칙이 되어야만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의 영성에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 중에 헨리 나우웬(1932-1996)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가톨릭의 사제이지만 그의 영향력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 모두에게 미치고 있습니다. 나우웬은 예일과 하바드에서 가르친 학자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남미 페루의 빈민가에서 빈민들과 그리고 캐나다의 지체 장애인 공동체(L’Arche Daybreak)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살았던 기독교 영성의 실천가로 더 기억되는 분입니다.

 

나우웬의 책 중에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제목에서부터 매료되어 단숨에 읽었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치유하심, 예수님의 선하심, 예수님의 가르치심, 예수님의 섬기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부끄러움 속에서 읽었습니다. 과연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서 예수님의 모습과 인격과 향기를 얼핏이나마 엿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자리와 안락함을 초연히 버리고 고통 받는 민초 속으로, 장애인들 속으로 들어가 살기를 소원했던 나우웬, 그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십니까? 저와 여러분이 어떤 신분으로, 어떤 장소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사랑으로 섬기는 종의 모습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 때문에 하나님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한국교회가 살게 되고, 세상이 소망을 가질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우리 하나님의 자랑이요 면류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