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28 부활 후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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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후 만남

(잠언 8:17, 골로새서 3:12-14, 요한복음 21:15-22)

 

요한복음 20:30-31절을 보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결론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은 추신이나 부록처럼 붙어있습니다. 왕년에 여러분도 편지를 쓸 때 중요한 것을 빠뜨리면 추신(Postscript)’을 덧붙여서 기록했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추신에 쓴 내용은 어쩌면 편지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연인끼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편지에 많이 쓰고 마지막에 추신으로 차마 꺼내지 못했던 사랑해요라는 말을 썼다면 앞의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는 별거 아니고 추신에 쓴 사랑해요라는 말이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일 것입니다. 이때에는 본문보다 추신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튼 추신에 쓴 내용은 중요하거나 꼭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요한은 왜 추신으로 요한복음 21장을 기록했을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초대교회에서 사도 베드로가 가졌던 권위를 옹호하기 위함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아니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왜 베드로가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표시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요한은 주님께서 어떻게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시고 목양의 사명을 맡겨주셨는지를 상기시키려고 요한복음 21장을 추신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에 대한 오해를 시정하기 위함입니다. 당시 요한은 주가 재림할 때까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요한을 비롯한 모든 사도들이 순교했지만 요한만은 끝까지 천수를 다하면서 살아있었기 때문에 생긴 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요한은 그것은 사실이 아님을 밝히려고 요한복음 21장을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베드로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를 부를 때와 너무나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3년 전 주님은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베드로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 때에도 베드로는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심히 많은 고기를 잡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나를 따르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오늘도 주님은 갈릴리 바다로 베드로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역시 베드로는 밤새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자 153마리나 되는 고기를 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무나 흡사하여 마치 3년 전의 일을 다시 보는듯한 느낌입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3년 전에는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지만 이제는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한 것, 3년 전에는 그저 심히 많은 고기였던 것이 이제는 구체적으로 153마리가 된 것, 그리고 3년 전에는 무거워서 그물이 찢어졌지만 이제는 무거웠지만 그물이 찢어지지 않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그 부름의 음성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주님과 베드로의 만남은 나를 따르라로 시작해서 나를 따르라로 마쳤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입니까?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를 따르라라는 주님의 음성에 온전히 자신이 내어맡기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또 다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베드로가 그 동안 제대로 주님을 따르지 못했나 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중요한 한 가지가 먼저 회복되어야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베드로는 주님을 다른 누구보다 아니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고 고백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내적 치유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주님도 그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베드로가 스스로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세 번 고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사랑고백은 이전과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이전에는 그냥 입술로 자신 있게 고백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분명히 알지만 주님만 사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님이 이 마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나를 도와주옵소서.”라는 기도가 동반된 사랑고백이었습니다. 깊이가 있는 사랑고백이었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아는 사랑고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이 베드로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시기 전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의 일을 감당할 자신이 있느냐, 능력이 있느냐, 건강이 있느냐, 재물이 있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리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다른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골로새서 314절의 말씀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말합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가 모두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 위에 사랑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사랑의 고백을 들은 후에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혹시나 베드로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 첫 사랑의 마음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그 애틋했던 사랑을 빼앗겨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이 시간 아무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사랑을 회복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잠언 817절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이 때 주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회복된 사람에게는 사명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이었습니까?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네 양이 아니라 내 양입니다. 베드로의 양이 아닙니다. 목사의 양이 아닙니다. 장로의 양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양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양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맡겨준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누구든지 모두가 주님의 귀한 양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맡은 모든 사명은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입니다. 이 주님의 사명을 감당할 때에 어쩌면 굉장히 힘들지도 모릅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십자가의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난을 각오해야 할 사명입니다. 속이 많이 상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히 속이 썩을 것입니다. 시간도, 물질도, 마음도 허비해야 할 사명입니다. 정말 사랑이 없으면 못할 짓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모두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양들을 향한 사명을 다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사랑은 수고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 소망의 인내, 사랑의 수고로 소문난 교회였습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따릅니다. 그 사랑의 수고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고도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시간과 물질과 몸과 마음까지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허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름 없는 한 여인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자기의 전부인 향유 옥합을 깨뜨려 자기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어 드렸습니다. 그 여인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사랑을 하는 사람은 늘 약자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질 수밖에 없고, 울 수밖에 없고, 마음 졸일 수밖에 없고, 참을 수밖에 없고.... 이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보다 약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는 줄 아십니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보다 부모가 자식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 대하여 약자이기를 원하셨듯이, 오늘 우리는 사랑의 약자가 되기로 합시다.

 

저는 베드로가 참 좋습니다. 허점이 많아서 좋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다시금 고백하고 주님의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다시금 회복한 후에 나를 따르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예 제가 이제는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를 따라 가겠네노래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것으로 멋있게 끝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건 또 뭡니까? 이제는 주님만 바라보면서 뒤따라야 하는데 왜 뒤를 돌아보면서 쟤는요? 요한은 어떻게 됩니까?” 묻는 바람에 분위기 다 깨집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실수를 저지름으로써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베드로 만세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야 제발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른 것을 따른다 해도 너만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다른 사람, 다른 것들에 관심과 신경을 빼앗깁니까? 그래도 주님은 다시금 너는 나를 따르라고 권고하십니다. 다른 사람 신경 쓸 것 없습니다. 나만은 주님을 따라가면 됩니다.

 

배신(背信), 배반(背反)이라고 할 때 배()는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나의 바른 자세는 서로 마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등을 보일 때 그것이 주님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빛이십니다. 우리가 빛을 등질 때에는 어두운 그림자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절망이고 멸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빛이신 주님을 마주 볼 때 우리의 어두움은 사라지고 밝은 빛만이 우리를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너무나 자주 넘어지고 실패하고 배신하는 베드로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울 때조차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주님을 바라봅시다. 나를 용서하시고 나에게 새 소망과 사명을 맡기시는 주님을 마주봅시다. 부끄럽지만 빛이신 주님을 향해 다시 돌아서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주여 나를 고쳐 주시고 나를 회복시켜 주소서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0세기를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목사님이 한 분 있습니다. 이 사람은 1906년 독일의 명문가에서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이 사람을 세계적인 신학자로 만든 것은 1937년에 출판된 <나를 따르라>(Nachfolge)라는 책이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고난 중에도 주님의 삶과 길을 좇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는 독일이 히틀러의 치하에 들어가자 미친 운전사가 버스를 몰고 있다면 마땅히 그를 버스에서 내어좇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히틀러에 반대하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됩니다. 그에게는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1943년 비밀경찰에게 체포되어 16개월을 감옥에서 고문과 심문을 당하다가 19454939세의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그가 옥에 있는 동안 쓴 편지들은 <옥중서신>(Widerstand und Ergebung)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습니다(독일어로 1951, 영어로 1953). 그가 모든 사람의 관심과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의 생각이 그의 삶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를 따르라>라는 책을 썼을 뿐만 아니라 그대로 살았던 20세기의 순교자였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디트리히트 본회퍼입니다. 본회퍼는 <옥중서신>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은 오늘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오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가 걸어간 길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 사명의 길은 주님에 대한 깊은 사랑이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하셨던 말씀들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내 양을 먹이라고 당부하십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나를 따르라고 부르십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인들입니까?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을 사랑합니다.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을 사랑합니다.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서 주님만 바라보고 걸어가게 하옵소서. 나로 평생에 주를 따르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이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