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문 그리고 부활
(겔 37:1-10, 계 3:7-13, 요 20:19-25)
미국 사람들은 분류하는 것을 좋아하고, 설문 조사를 통해 객관성을 확인하기를 좋아합니다. 몇 년 전 미국 유력 기독교 잡지인 리더십 저널과 기독교출판사인 존 더반사가 공동으로 여론 조사를 실시한 결과 다섯 종류의 크리스천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첫째, Active 크리스천, 활동적인 기독교인으로, 예수를 구주로 믿고 말씀과 기도생활 등 영성생활도 꾸준히 하며 교회봉사도 하고, 전도도 하는 사람들입니다. 전체 응답자의 19%를 차지했습니다.
둘째, Professing 크리스천, 고백적 기독교인은 분명한 신앙고백으로 예수를 믿어 구원을 입었지만 Active 크리스천에 비해 봉사나 전도에 소극적인 사람들인데, 20%를 차지했습니다.
셋째, Liturgical 크리스천, 예전적 기독교인은 주일 예배는 빠짐없이 드리지만 그 이외 행사에는 소극적인 사람들로 16%를 차지했습니다.
넷째, Private 크리스천, 개인적 기독교인은 전체 응답자의 24%로 가장 많았는데 주로 젊은 층들로 하나님을 믿지만 교회 출석을 잘 하지 않고 봉사도 하지 않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다섯째로, Cultural 크리스천, 문화적 기독교인은 하나님은 인정하나 예수를 반드시 믿어야 구원을 얻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기독교를 여러 개 종교 중의 하나라고 보는 다원주의적 신앙이지요. 이 사람들이 21%를 차지했습니다.
이 설문조사에 응답한 사람들 중 “부활을 믿느냐?”는 설문에 대해 “믿는다.”고 답한 사람이 40%, “믿지 않는다.”고 답한 사람이 40%, “잘 모르겠다.”고 답한 사람이 20%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니까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예수 부활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읽고, 신앙생활도 오래 해 왔고, 이 자리에 앉아서 부활절 예배도 드리지만 마음으로는 부활은 사실이라기보다는 그저 영적 의미가 풍성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였던 빌리 그래함 목사는 “내가 만일 적 그리스도였다면 나는 부활을 집중적으로 공격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핵심은 곧 부활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부활은 검증의 대상이 아닙니다. 또한 이해의 대상도 아닙니다. 부활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부활은 이해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체험을 통해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제자들조차 부활의 주님을 믿지 않았겠습니까? 도마는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 했습니다.
희망의 신학을 말한 독일 몰트만 교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필히 넘어야 할 두 개의 큰 산이 있는데, 하나는 구약에 있는 창조라는 산이고, 따른 하나는 신약에 있는 부활이라는 산이다.” 했습니다. 이 두 산을 정복한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부활은 또 하나의 창조 사건입니다.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부활 또한 못 믿을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과 십자가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십자가와 부활 없는 기독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부활 신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 간다는 것도, 내세를 믿는 것도 부활 신앙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기초가 거짓이라면 그 위에 세워진 건축물은 일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부활은 역사적 진실이거나 아니면 황당한 거짓말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부활 주일을 맞아 어떤 말씀을 전할까 정말로 많이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부활에 관련된 복음서와 서신서 이야기를 다 읽었습니다. 제가 설교 준비가 잘 안 될 때 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어떤 주제나 절기가 있으면 그와 관련된 성경 이야기를 읽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기하게 전해야 할 말씀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제가 부활절 설교를 준비하다 오늘 본문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것은 오늘 제자들과 공동체가 처한 현실과 설교자인 저와 우리 교회가 처한 현실이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성경공부가 아닙니다. 상황과 현실과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선포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설교는 설교자와 설교를 듣는 공동체와 하나님의 말씀이 만나는 사건입니다. 설교는 Text인 성경과 현실인 Context가 만나는 사건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설교자인 제가 처한 현실과 설교를 듣는 교회공동체가 처한 현실이 거의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주 복잡합니다. 저의 마음과 여러분의 마음이 복잡한 것만큼 오늘 본문 말씀도 복잡하고 헝클어져 있습니다. 질서와 조화로 정돈 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것들이 막 섞여 있습니다. 마치 서로 연결되지 않는 장면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한 장면이 화면에 떴습니다. 그 다음에 전혀 연결되지 않는 다른 장면이 갑자기 나타납니다.
이럴 때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도대체 이 영화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퍼즐처럼 한 장면 한 장면 짝이 맞지 않는 것 같아?” 라고 말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타나는 서로 다른 장면들을 뒤엉켜 있습니다. 서로 다른 장면들을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는 단순한 방법은 없습니다.
또 다른 결정적인 장면은 문이 닫혀있다는 것입니다. 문만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방이 가로막혀 있습니다. 그 위에 두려움마저 지배하고 있습니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주님 없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사방 욱여쌈을 당하였습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직전의 제자들과 교회가 처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들을 어떻게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늘의 이야기를 들어보시겠습니다. 예수님이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우리가 주일로 지키는 날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이 사건은 부활하신 날 저녁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제자들이 장소를 밝히지 않은 어느 곳엔가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문을 걸어 굳게 닫고 은밀하게 모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께서 그들 한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샬롬 하레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마 우리는 의아해 할 것입니다. 어떻게 들어오실 수 있었는가? 문은 굳게 닫혀 있었는데!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 한가운데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의아해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른 사람이 다친 상처를 보면 마음이 안쓰러운 것이 정상 아닙니까? 예수님의 상처, 그러니까 못 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는 죽음의 상처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상처를 보여주시는데 어찌 기뻐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제자들이 제 정신입니까? 그리고 예수께서 다시금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우리는 의아해 할 것입니다. 닫힌 문으로 들어오시면서 방금 그 말씀을 하시지 않았던가? 왜 두 번씩이나 똑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그리고 전혀 앞의 장면과 연결이 되지 않는 일이 일어납니다. 갑자기 뜬금없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 아십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어납니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면서 말씀하시기를 후 하고 입김을 내 뱉으시면서 “성령을 받으라.” 하시는 것입니다.
자,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일련의 행동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있는 것일까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일들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 아닙니까? 한번 다음 장면을 연결시켜 보십시오. 연결되는 지도 생각해 보시고, 그리고 이 장면들이 과연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지 생각해 보십시오.
문은 굳게 닫혀있는데 예수께서 문도 열지 않고 들어오시더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십니다. 당황스럽게도 불쑥 자신의 못 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제자들은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다시금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십니다. 또한 밑도 끝도 없이 “내가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뿜으면서 “성령을 받으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 뒤죽박죽 된 여러 가지 장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열쇠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진 말씀으로 보고 있지만 이 말씀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본문을 하나로 관통시켜주는 열쇠를 가지고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 열쇠가 무엇입니까? 바로 “닫힌 문”입니다. 닫힌 문 안쪽에 이야기의 비밀을 여는 열쇠가 숨겨져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문이 닫혀 있는 방에 문도 열지 않고 들어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닫힌 문을 통과하여 들어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문은 어떤 문입니까? 예수와 제자 사이에 막혀 있던 문입니다. 예수와 우리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문입니다. 제자들 사이에 서로를 믿을 수 없는 닫힌 문이 있었습니다. 또한 내일을 예측할 수 있는 미래의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제자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닫힌 문은 어떤 것들입니까? 제일 먼저는 두려움의 문입니다. 그 다음은 의심의 문입니다. 이것은 육중한 철문과 같아서 좀처럼 열리지 않는 문입니다. 부활은 이 육중한 두려움의 문과 의심을 문을 여는 것입니다. 부활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자체가 두려움이라는 이름의 닫힌 문, 의심이라는 이름의 닫힌 문을 여는 것입니다.
첫 번째 부활주일 저녁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보도를 듣지를 못했습니다. 또한 주님이 부활 하시리라는 것을 상상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습니다. 죽은 예수도 예수지만 예수의 잔당으로 몰려 자신이 처형당할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문을 꼭꼭 닫아두고서 “우리가 앞으로 어찌 할꼬!” 하면서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두려움으로 인해 닫힌 문을 통과해서 들어오신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진실이 드러날 두려움 때문에 거짓말 하고, 두려움 때문에 폭력을 사용하고, 두려움 때문에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두려움 때문에 누군가를 죽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 기득권층은 자신들이 세워놓고 누리고 있는 질서가 깨어질 것이 두려워 예수를 죽였습니다. 빌라도는 민원이 발생하여 자신의 정치적 미래가 깨어질 것이 두려워 무죄한 예수를 죽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잔당으로 몰려 자신도 고문당할 것이 두려워 예수를 배반했습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내가 나답지 못하게 행동할 때,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게 행동할 때,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끔찍한 일을 저지를 때, 거의 대부분 두려움의 조종 받고 있을 때입니다. 이것은 비단 사건이 있을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부활절 아침에 주님 앞에 서 있는 우리도 닫힌 문을 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서, 안전을 위해서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은 우리의 삶을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갑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영혼을 쇠약하게 만듭니다. 지금 이 시대는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두려움의 지배를 받아 사회 전체가 신경쇠약에 걸린 상태입니다. 두려움은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을 대항하여 서게 만듭니다. 대인공포증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궁지에 몰린 고양이처럼 퍼렇게 질리게 만듭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변화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질병에 걸릴까 두려워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마치 문을 잠그고 있는 제자들처럼 우리 역시 두려움의 문을 잠그고 걱정하고 소리 없이 떨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안전은 일시적인 안전이고, 도피적인 안전입니다. 참호 속의 안전일 뿐입니다.
“유대인들이 두려워 제자들은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는데 그때 예수께서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시기를 샬롬 하셨더라.” 이것이 우리의 두려움에 대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대답이요, 가장 확실한 해답입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신 예수! 다시 말해서 그분 자신이 우리의 두려움에 대한 응답이요, 그분의 현존과 임재가 우리의 두려움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이 다 내게 속하였노라. 이 세상이 너희를 결코 파괴하지 못하니라. 내가 이 세상을 정복하였노라.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 문들아 열릴지어다. 문들아 열릴지어다. 두려움을 문을 열어라. 내가 너에게 들어가리라.
사도 요한은 빌라델피아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열면 닫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닫으면 열 사람이 없습니다. 그 누구도 두려움과 의심의 닫힌 문을 열고 내 마음 속으로 들어올 수 없는데 부활하신 그분께서 닫힌 문을 열고 내 마음 속으로 침투해 오셨습니다. 우리 교회 속으로 침투해 오셨습니다. 이것이 2019년 부활절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우리의 삶을 채워달라고 간청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위에 숨을 불어넣어주시고, 성령을 부어달라고 간구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직관이 얼마나 정확한 지를 탄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엔가 쫓기고 두려워하는 일이 있으면 숨결이 거칠어지고 맥박이 빨리 뜁니다. 이때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숨을 크게 내쉬고 들이쉽니다. 소위 날숨과 들숨을 반복합니다. 그러면 두려움의 리듬에 호흡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자기를 알아차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두려움으로 인해 숨결이 거칠어진 제자들을 향해 후 하고 성령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당신의 부활의 숨결을 제자의 가슴에 불어넣어서 하나님의 숨결을 따라 숨을 쉬라는 것입니다. 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같은 성령을 받으라는 이야기가 이렇게 깊은 뜻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묘합니다.
두려움은 마치 잡초와 같습니다. 가꾸고 관리하지 않는 정원은 언제나 잡초가 가득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정원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로 채우지 않으면 언제나 두려움의 잡초가 가득 자라날 것입니다. 언제입니까?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가 없을 때, 우리의 삶이 영적으로 공허할 때, 분명히 그곳에 두려움은 싹트고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비어있는 마음의 정원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셔서 “샬롬 하레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두려움으로 떨고 제자들에게 오셔서 두 번이나 선포하신 그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유대인이 두려워 문을 닫아걸고 있을 때, 예수께서 오셔서 샬롬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두려움으로 인해 닫혀 있는 우리의 문을 뚫고 들어오십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의심으로 닫혀 있는 문을 뚫고 들어오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심은 지식으로의 의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 하는 과학적인 의심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여기에서 말하는 의심은 매일 일상에서 맨손으로 살아갈 때 생기는 그런 회의와 의심을 말합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문은 닫혀 있는데 예수는 들어오시고” 두려움의 문은 닫혀 있는데 예수는 들어오시고, 의심으로 닫혀 있는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저들 한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활절은 닫힌 문을 뚫고 예수께서 들어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절은 예수께서 우리의 두려움과 의심의 문을 뚫고 들어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부활절은 예수께서 개인을 넘어서서 교회 공동체에 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마는 부활주일 저녁에 나타나신 예수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가 제자들의 공동체에 함께 참석하여 일원이 되고서야 비로소 예수는 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 그에게 주님을 만나는 큰 영광을 주신 것은 개인적으로 만나서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나타나신 것은 개인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공동체 앞에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신자들의 공동체야말로 우리가 우리의 두려움과 의심을 나누고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로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안식일 아니라 주일을 지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주님 부활하신 날을 매주 기억하며 지키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부활절 아침에 교회공동체로 부르셨습니까? 두려움과 의심을 주님 부활하신 이 날에 공동체 안에서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말입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는 곳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우리의 두려움과 의심의 잠긴 문들을 관통하여 들어오십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를 포함하여 이 자리에 있어야 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수많은 박해를 받으면서 두려움을 이겨내었던 힘이 예배공동체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공동체 가운데 오셔서 두려움과 의심을 극복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제가 직면해 있는 닫힌 문, 우리 교회가 만나고 있는 헝클어진 모습, 이 한 가운데를 뚫고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샬롬 하레켐 여러분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이 우리 가운데 울려 퍼져서 닫힌 문이 열리고, 헝클어진 질서가 새롭게 회복되는 그런 부활절 아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우리 주님 부활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두려움과 의심으로 굳게 닫힌 문을 관통하고 우리 공동체 가운데 오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 예수의 숨결을 가슴에 가득 채워 두려움과 의심을 극복하고 참 평화를 간직하고 만들어가는 갈릴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