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진 휘장, 찢어져야 할 휘장
(출 26:31-35, 히 4:12-14, 마 27:45-54)
오늘은 교회력에 따라 종려주일로 지킵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행하신 행적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당시 제자들을 포함해서 예수님을 따랐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이 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지 몰랐습니다. 아니 몰랐다고 하기 보다는 오해했다고 하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예수님은 권세 있는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자를 치유하시고, 귀신 쫓아내시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심지어 죽은 자까지 살리는 대단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적어도 갈릴리에서는 말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이 흔들리는 놀라운 일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하나님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은 머지않아 로마의 지배와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따르고 보좌했던 사람들에게는 보상의 시기가 도래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전쟁 영웅이나 개선장군이 입성할 때 펼치는 퍼레이드처럼 열광하는 인파들, 종려나무가지를 흔드는 사람들, 자기 겉옷을 벗어 길에 까는 사람들, 그야말로 군중의 함성으로 가득한 하루였습니다. 이것이 종려주일의 풍경입니다.
그런데 제자들과 군중들의 이런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시자마자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갈릴리에서 보았던 능력 많으신 분이 아니라 악인들 앞에서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무력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왜 힘 있는데 힘 사용하지 않습니까? 능력에 있는데 왜 능력 발휘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자신을 모함해서 죽이려는 세력 앞에서 말입니다.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것을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이것이 제자들과 군중들이 예수님을 배반한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자신들이 기대했던 하나님나라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나라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나라는 당신이 죽어서 이루는 나라, 자신의 죽음으로 죄인까지 살리는 나라였습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에 죽으러 올라오셨습니다.
우리는 종려주일이면 십자가와 대속의 죽음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오늘 좀 다른 시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갈 실 때 왜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는가? 휘장이 찢어진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사건 그 자체보다 너무나 많은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동시에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에 못 이겨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씀을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휘장이 무엇이기에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찢어졌을까요? 영어성경은 휘장을 베일 혹은 커텐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흔히 휘장이라 하면 무언가 고상한 것 같고 좀 성스럽다는 느낌을 주는데 사실 알고 보면 휘장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단지 지성소를 두르고 있는 보호막이고 성소에 드리워져 있으니까 무언가 신비스런 느낌을 줄 따름입니다.
그러나 휘장 그 자체는 별 것 아니지만 유대인들의 입장, 그것도 제사장들의 입장에서 볼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너무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성소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는 반드시 베일에 가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휘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막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막을 기능적으로 말하면 이동식 성전입니다. 장소나 사람에게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 다녔습니다. 하나님의 역동성을 가장 잘 담아놓은 이상적인 성전입니다. 이 성막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성막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뿐 아니라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성막의 또 다른 이름은 회막인데, 영어성경은 meeting tent라 불렀습니다. 성막은 위로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장소였고, 아래로는 온 백성들이 함께 나와서 서로를 소통하는 자리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죄를 씻고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소통의 의미를 넘어 막힌 담이 무너지고 하나가 되는 자리였습니다.
성막은 광야에서 그 백성들과 함께 이동하다가 가나안 정착 이후에는 실로에 있는 산당에 모셔졌습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의 타락한 두 아들이 블레셋과의 전쟁에 법궤를 들고 나갔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믿지도 않는 망나니 같은 홉니와 비느하스였지만 법궤를 부적처럼 믿었습니다. “법궤만 있으면 우리가 전쟁에서 이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전쟁에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도 죽고 이스라엘 병사 3만 명이 죽고, 법궤도 블레셋에게 빼앗겼습니다.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도 이스라엘을 떠났습니다.
빼앗긴 법궤가 있는 곳에 좋지 않는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블레셋 사람의 신전에 있는 다곤 신상의 목이 부러지고, 법궤가 모셔진 곳에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그러자 겁이 난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수레에 실어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었습니다. 돌아온 법궤는 기브온에 있는 성막에 머물렀습니다. 이후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고 나서 성막은 성전지하 창고에 보관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전 589년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함께 성막과 법궤도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제 성막 안을 살펴보겠습니다. 성막 안에 들어가면 맨 앞자리에 가장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와 성소가 따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성소란 우리말로 거룩한 장소란 뜻이고 지성소란 거룩한 중에서도 가장 거룩한 장소라는 뜻이지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언제나 지도자 모세를 통해서 전해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 이후에는 대제사장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때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바로 지성소였습니다.
성막 안 지성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법궤입니다. 이 법궤는 나무 상자인데 그 안에 모세가 받았던 십계명 돌판과 만나를 담았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습니다. 그 위에 날개달린 천사 그룹이 법궤를 덮고 있는데 대제사장이 염소의 피를 뿌리고 천사의 날개 사이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합니다. 이 자리가 바로 시은소, 시은좌입니다. 죄가 씻겨지고, 은혜가 시작된다고 시은좌라 부른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누구나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은혜의 보좌라고 말했습니다.
대제사장이라고 해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 속죄일 일 년에 단 한 차례만 들어갈 있었습니다. 허리에 끈을 묶고, 옷 술에 방울을 달랐습니다. 방울 소리가 나지 않으면 성소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허리에 묶인 끈을 당겨 꺼냅니다. 출애굽기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휘장을 주신 까닭은 너희를 위하여, 즉 사람들을 위하여 주셨다고 하는 대목이 눈에 크게 띌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위하여 주신 휘장이 그만 예수의 죽음과 함께 찢어진 것입니다. 그 옛날 약속된 가나안을 향해 고된 행진 속에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호흡하시고 말씀하셨던 그 천막성전의 지성소를 가리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만들었던 휘장, 생명보다 소중히 여겼던 휘장,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는 휘장이 왜 찢어졌을까요? 사람이 찢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동시에 찢어진 휘장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만드셨던 휘장인데 그 휘장이 찢어졌다면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스스로 포기하셨다는 뜻일까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옛날 히브리 민족에게 주셨던 천막성전의 휘장과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에 무슨 차이가 있어서 찢어진 것일까요?
천막성전 속에 있었던 휘장과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성전 안에서 찢어진 휘장 사이에는 약 1400여 년이라는 시간의 거리가 있고 휘장을 만들었던 재료도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본질적인 문제가 하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원래 이스라엘에게는 다른 신이 절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임재를 모시는 지성소가 있는 성전에는 두 말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신을 결코 용납되지 아니하는 광야의 성막을 따라 새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 뜰 안에 이방신이 허용되고 말았습니다. 성전을 더럽히고 만 것입니다. 성전을 더럽힌 장본인은 성전을 지은 솔로몬 왕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고 있듯이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지혜가 있었고 덤으로 재물까지 풍부했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타락하여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이방신을 성전에 들이다니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잘 모셔보겠다고 세운 웅장한 성전, 바로 그 건물 속에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솔로몬의 배신이 있었다는 이 아이러니한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는 정말 갸륵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왕의 능력으로 지었기 때문에 왕실의 통제를 받았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광야에서 호흡했던 성막이 이제는 왕실 종교가 되었고, 권력에 갇힌 성전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눈물과 아픔에는 동떨어진 신전종교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바야흐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날,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은 다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성자로 보이던 예수님이 채찍을 든 성난 혁명가로 돌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세워진 천막성전의 휘장과 예루살렘성전 안에서 찢어진 휘장 사이에는 본질적인 문제 하나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종교’로 바꿔치기를 한 것입니다. 한분 야훼 하나님을 복을 주시는 신들로 바꾼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 바꿔치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약속을 값싼 계약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한 제사를 몇 푼주고 사고파는 돈값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보다는 종교의 높은 성을 쌓아 놓고 이익이나 바라는 제사장들의 전유물로 타락하여 버렸습니다.
인간이 주인 되려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떠납니다.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났습니다. 거룩한 모양을 갖춘 예배가 있었으나 거기에는 정의도 진실도 하나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 때의 성전 안 휘장은 하나님이 떠나버린 텅 빈 지성소를 가리고 있을 뿐, 그곳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성전 휘장은 하나님이 떠나버린 지성소와 성소 사이를 분리하는 분열의 휘장이었습니다. 그 옛날 장막의 휘장은 만남을 위한 휘장이었으나,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은 거짓 거룩과 세상을 단절하는 칸막이에 불과한 커텐이었고, 거짓을 은폐시켜 온 위선의 휘장으로 전락해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종려주일 아침, 종려가지를 손에 들고서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를 외치던 저 옛날 이스라엘 군중들 속에서 바로 이 찢어져야 할 휘장을 보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모신다고 소리 높여 외치는 웅장한 예배당 속에 여전히 찢어져야 할 휘장이 있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 거짓 휘장 속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병들고 있습니다. 예수가 드러나고 하나님이 드러나야 할 교회가 예수는 이름뿐이고, 사람이 자기 드려내려 한다면 이것 역시 하나님이 떠난 지성소를 가리고 있는 찢어져야 할 휘장입니다. 왜냐하면 그 휘장이 찢어져야 바로 그 찢어진 휘장 사이로 하나님이 새롭게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 그 자체로 주는 메시지가 많이 숨겨져 있습니다. 첫 번째로, 성전 휘장은 찢어졌을 뿐, 완전히 제거하시거나, 전적으로 파괴하려 하신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휘장은 더 이상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는 장벽이 아니라, 들어가기 위한 출입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휘장만 찢어졌을 뿐 성전은 여전히 건재했습니다. 누구든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고, 오랫동안 닫혀 있던 지성소가 바깥뜰처럼 완전히 개방되어 누구나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세 번째로, 휘장은 위에서 아래로 두 갈래로 찢어졌습니다. 이것은 땅과 하늘 사이를 가르며 굳게 닫혔던 문이 활짝 열린 것을 보여줍니다. 성전 지붕에서 바닥에 이르기까지 휘장을 제외한 성전의 나머지 모든 부분은 온전하였습니다. 옛 휘장만 남김없이 찢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 땅에 이르기까지, 곧 하나님의 보좌에서 사람의 거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가로막던 장벽은 남김없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네 번째로, 휘장은 제사장들의 눈앞에서 찢어졌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은 기득권을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자 자기들이 만든 질서를 깨트린다고 죽인 것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지만 휘장 뒤에 숨어서 온갖 음모와 거짓으로 예수님을 죽인 것이지요. 이 거짓 휘장을 바로 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이 친히 찢으신 것입니다. 베일에 가려진 저들의 음모를 온 천하에 드러내신 것이지요.
다섯 번째로, 휘장이 찢어짐으로 인해, 누구든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도 신성모독이었는데 이제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열린 초대가 되었습니다.
여섯 번째로, 휘장은 저녁 희생을 드리는 시간에 찢어졌습니다. 3시, 해질 무렵,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놋 희생단 위에 올려 졌습니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그 일을 이룬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휘장의 찢어짐과 하나님의 어린양의 죽음은 하나였습니다.
일곱 번째로, 하나님은 당신이 떠난 자리를 거룩한 것처럼 꾸몄던 이스라엘의 종교화를 전적으로 거부하셨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이 멀쩡한 휘장을 찢으셨을까요?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거룩도 받아들이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거룩은 그것이 무엇이든 거룩이 될 수 없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만나는 것은 믿음과 사랑이지 그 어떤 거룩한 조직도 교리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는 가끔 오늘날의 교회를 보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신앙이 많은 것 같으나 실상은 신앙보다는 종교와 조직에 더 얽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자기 교회가 우상화됩니다.
여러분! 제도와 조직이 필요한 것이긴 해도 그 자체가 신앙화 되어서 사람들을 강제하고 얽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회의 전통과 역사도 그렇습니다. 고귀한 것은 간직해야 하지만 그 역사와 전통 자체는 결코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행진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단호히 찢어버리는 용기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텅 빈 예배와 선교와 봉사와 친교를 겉보기로만 거룩한 것으로 착각한다면 언제이고 우리도 저 옛날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 안의 ‘휘장’처럼 찢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자리를 ‘장사하는 소굴’로 전락시킨 곳을 반드시 깨뜨리시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대부분의 교회가 히틀러를 찬양하고, 탈선을 걷고 있을 때, 죽음을 앞에 두고 감옥에 있던 독일의 신학자 Bonhoeffer가 말하기를 “인간이 조작한 종교와 신앙은 항상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축복만을 약속한다.”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진짜 종교는 조작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삶의 한복판에서 희로애락을 겪을 때 하나님과 함께 울고 웃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인간성의 뚫고 침투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마지막으로, 찢어진 휘장은 모든 사람에게 열어 놓으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해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성전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찢어진 성전 휘장 속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음성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더불어 세상과 하나님을 단절하던 휘장이 찢어지면서 이제는 하나님과 세계가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고통과 연약함 속에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들어오신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와 감격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될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조작이나 제도, 그리고 인간의 행위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반대로 찢어진 휘장을 뚫고 우리의 삶 속에 침투하시는 은총의 하나님을 우리 생활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감사와 감격에서 새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찢어진 휘장!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찢어 나누어 주신 그리스도의 몸이었습니다. 옛 종교가 찢어진 그 자리에 새로운 신앙이 태동했습니다. 새로운 신앙으로 살았던 사람은 종교에 매여 있던 제사장들이 아니라 갈릴리 어부들이었고, 민중이었습니다. 형식적 거룩과 종교의 눈으로 보았던 제사장들의 눈이 아니라, 우리네 인생 안에 있는 성공과 실패 앞에 솔직했던 삶의 눈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던 어부들에게서 참 신앙이 싹튼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휘장을 찢고 침투하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어부와 민중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거룩으로 위장하려는 휘장이 나와 하나님 사이, 나와 내 속 사람 사이, 나와 이웃 사이를 가로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으로 찢으신 휘장과 함께 찢어야 할 거짓 휘장들이 있다면 그것을 찢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의례적이거나 형식적인 종교의 눈이 아니라 오늘의 삶에 솔직하고자 하는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과 함께 새로운 신앙의 힘으로 새날들을 열어가는 갈릴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