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07 영광과 욕됨이 교차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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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과 욕됨이 교차할 때

(3:13-18, 고후 6:3-10, 5:10-12)

 

역사가 오래 된 교회는 뚜렷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욕됨의 세월을 믿음으로 잘 이겨내었다는 점입니다. 저는 100년의 역사가 넘는 3개 교회에서 부목사, 담임목사를 지냈습니다. 특히 제가 부목사로 5년을 섬겼던 부산진교회는 한강이남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한국교회 역사에 최초로 당회록을 남긴 교회입니다.

 

그리고 담임목회를 했던 문경 교회는 올해로 116년 되었고, 설립하신 성도가 순교를 했습니다. 100년 넘는 세월을 견디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 시절도 있었고, 하나님 앞에 욕됨을 드러낸 시절도 있었습니다. 자신을 순교의 제물로 드려서 교회의 얼이 살아있게 한 이야기도 있고, 교회가 일제 탄압에 의해 강제로 패쇄 되었던 이야기도 있고, 교회 앞에서 함부로 행하다가 심판받았던 이야기도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한 시기도 있었는가 하면, 교회가 박해로 인해 욕됨을 겪은 역사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특정한 교회의 역사만이 아니라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입니다. 한마디로 영광과 욕됨이 교차하는 역사입니다.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로마제국 아래에서 초대교회는 모진 박해로 욕됨을 경험했습니다. 이 욕됨의 역사를 믿음으로 이겨내어 마침내 기독교가 공인되었습니다.

 

또한 세속적인 영광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과 야합하여 타락의 길로 걸었던 욕됨의 역사도 있습니다. 교회가 힘과 권력이 생기자 성지를 탈환한다는 목적으로 10여 차례 넘게 십자군 전쟁에 성도들을 동원한 부끄러운 역사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교회의 역사는 영광과 욕됨이 교차하는 역사입니다.

 

어디 교회만 그렇습니까? 우리네 인생 이야기도 영광과 욕됨이 교차하는 이야기 아닙니까? 꽃피고 새우는 잘 나가던 영광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또한 영광의 시절에 가려진 눈물의 욕됨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내가 누리는 기쁨과 영광이 다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인생이 어디 우리 마음대로 됩니까? 욕됨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으로 인해, 오래 동안 쌓아놓았던 영광이 무너집니다. 우리는 이 욕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영어 성경은 영광과 욕됨을 glory and dishonor, 영광과 불명예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명예가 가려질 때, 내 명예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명예를 짓밟습니다. 나의 욕됨을 가리기 위해 다른 사람을 욕되게 해서 내 영광을 지키려 합니다. 우리는 영광과 불명예 가운데서 받는 유혹을 어떻게 극복해야 합니까?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영광과 욕됨이 교차하는 인생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영광과 욕됨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누구보다 영광과 욕됨이 교차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속에서 역설적인 신비를 경험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정반대되는 역설. 사람의 뜻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신비가 그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영광과 존귀를 누리는 것이 나중에는 오히려 욕됨이 되고, 욕됨을 겪는 것이 오히려 영광이 되는 역설을 말입니다.

 

그가 겪었던 욕됨이 무엇입니까? 먼저, 많이 견디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느 한 순간에 찾아온 어려움도 아니고, 특정한 원인이 있어서 찾아온 어려움도 아닙니다. 여러 가지 상황에서 많이 견뎌야 했습니다. 환난과 외부로부터 어려움과 박해가 있었습니다. 궁핍과 가난한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굶기도 했습니다. 사도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고난이었습니다.

 

매 맞음으로 바울은 40에 하나 감하는 태장을 세 번 맞았습니다. 그가 제 1차 전도여행 때 가장 먼저 방문한 구브로 섬에서 태장을 맞았습니다. 바울이 기둥에 묶여 채찍을 맞았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구브로 섬 살라미에 바울채찍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바울은 이때의 심정을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표현을 점잖게 해서 그렇지 너무 힘들어서 자살의 충동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갇힘,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혀 만신창이가 되도록 맞았습니다. 생애 마지막에는 로마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어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4권의 옥중서신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빌립보에서, 에베소에서 난동이 있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난동을 부린 정도가 아니라 돌로 쳐서 죽은 줄로 여기고 성 밖으로 끌어내었습니다. 여기에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이 더해졌습니다. 평생 삶으로 지는 십자가를 지고 살았습니다.

 

이런 바울을 교인들이 알아주었습니까? 설교가 자기들 입맛에 맞지 않다고 글은 뛰어난데 말은 졸하다.했습니다. 어려움을 겪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해야 한다고 하니 바울이 돈 밝힌다고 했습니다. 누가 바울에 대해 비난할 수 있습니까? 바울처럼 산 사람, 아니 바울의 반만큼이라도 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도 사람 아닙니까? 이렇게 욕됨을 당하면 사람이 거칠어지기 쉽고 악만 남기 쉽습니다. 되로 받으면 말로 갚아주고 싶은 것이 보통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처럼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깨끗함으로. 자리 연연하거나 추하게 기웃거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진정성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발에 먼지까지 털고 갔습니다. 지식으로. 사람들 귀에 듣기 좋은 말씀 전한 것이 아니라 묵상과 기도로 깊은 진리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래 참음으로. 사람의 마음에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농부처럼 오래 참았습니다. 자비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성도들을 돌보았습니다.

 

성령의 감화로. 자기 혈기와 욕심으로 하지 않고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서 행했습니다. 여기에 거짓이 없는 사랑으로. 누구나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이라는 말 속에 자기 이기심을 감추고 다른 사람을 속이고 마음을 도둑질 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거짓이 없는 사랑으로 평생을 섬겼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바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일은 자기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욕됨을 믿음의 방법으로 다 견뎌내었고,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되었습니다.

 

더 깊이 생각해 볼 점은 바울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단순한 의무감 때문에 수많은 욕됨을 견뎌내었을까요? 바울은 의무감으로 억지로 일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수많은 욕됨을 당하면서도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하루 이틀 같으면 이를 악물고 오기로 버틸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의 일생이 끝나는 날까지 욕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고백하기를 밖으로는 두려움이요, 속으로는 근심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괴로운 삶이 계속되었는데도 바울은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비밀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영광과 욕됨의 여정 속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경험했습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부활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죽어서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드린 삶 속에서 경험했습니다. 바울에게 다가온 영광과 욕됨은 신비요 역설이었습니다. 죽지 않고 부활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위해 욕됨을 겪지 않고 영광을 누린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바울은 삶 속에서 영광과 욕됨의 신비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욕됨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고난 받는 자와 약자와 함께하신다고 그토록 교훈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강자를 통해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으로 선포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래서 반대논리로 약자를 버림받은 사람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원뜻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것은 교회마저 경쟁주의로 몰아넣는 무서운 왜곡입니다. 욕됨과 십자가를 잃어버린 교회의 모습입니다.

 

영광이 계속되면 영혼이 타락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 부귀영화가 계속되자 타락했습니다. 그가 죽자마자 나라가 둘로 갈라졌습니다.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은 욕됨과 눈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인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보십시오. 왕이 살려주고 싶어서 금 신상에 절 한번만 하라고 하는데도 욕됨을 선택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잘못된 영광보다는 욕됨을 택하여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님 때문에 포기하는 것 없이 영광만 구한다면 거짓 신자입니다. 영광을 지속하고 싶어서 욕됨을 포기한다면 우리 또한 부자 청년입니다. 이 욕됨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눈물 흘려야 합니다. 바울은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자기가 율법으로 흠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보니 너무나 죄 많은 자신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눈물 흘리게 하는 이유입니다.

저는 자신의 인간성 때문에, 자신의 한계성 때문에 울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깊이를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자기 절망에 빠져서, 스스로 죄 가운데서 해어 나올 수 없어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해보지 않은 사람은 눈물의 가치를 모릅니다. 바울은 자기 죄 때문에 울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 믿는다면 자신의 인간성의 한계 때문에, 자신의 죄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가능성에 대해 절대적으로 절망해야 예수께서 주시는 새사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자신에 대해 절망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예수를 주인으로 삼지 않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참회의 눈물을 흘려 본 사람이 겸손합니다. 사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합니까?

 

우리는 무지해서 죄 짓고, 지식이 있으면 교만해서 죄짓습니다. 가난하면 가난해서 죄짓고, 부하면 잘 먹어서 죄짓는 것이 인간 아닙니까? 죄 지으면 낙심하여 포기해서 죄짓고, 무엇을 이루었다 하면 자만심에 빠져서 죄짓는 것이 인간의 실상 아닙니까? 죄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인간 본성의 문제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건져내랴!이 절망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또 바울은 자신의 사명 때문에 울었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을 선교할 원대한 사명, 예수의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는 사명 때문에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명 감당하느라 동족들에게 멸시받고, 사명 감당하느라 태장을 맞고, 사명 감당하느라 감옥에 갇히고, 사명 감당하기 위해 평생을 울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목회자에 대해 말을 많이 합니다. 이렇게 수고하는 바울에 대해 오해를 하고 서슴지 않고 비난하는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억울했습니다. 그것 견디려고 하니까 너무 힘이 들어 하나님 앞에 펑펑 우는 겁니다. 자신의 마음의 그릇은 작은데 성도들은 마음이 푸근한 바다와 같은 그릇을 요구합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울어야 합니다. 울면 마음의 그릇이 커집니다. 사람의 마음의 그릇은 그냥 커지지 않습니다. 울면 커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욕됨이요, 눈물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욕됨이 영광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눈으로 그리스도인의 역설적인 삶을 증거 합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보는 관점이나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보는 방식입니다. 바울은 일곱 가지 신비를 발견했습니다.

 

먼저,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속이는 자로 취급을 하였습니다. 반대자들이 중상모략을 하고 바울을 거짓말쟁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거짓 사도라고 악한 소문을 냈습니다. 세상은 늘 복음이 들어가면 거부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반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은 인간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보면 욕 얻어먹어야 제대로 된 설교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양심을 가진 하나님의 참된 일꾼이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무명한 자가 되었습니다. 본래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동족들에게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가 스데반에게 돌을 던질 때 내민 이력서는 세상에서 정말로 유명한 자였습니다. 그때 바울의 이력서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왕을 배출한 베냐민 지파 사람이요,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당대 최고의 스승 가말리엘 문하에서 히브리 학문을 관통했고, 다소 대학에서 헬라 철학을 공부했고, 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였습니다. 여기에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최고의 스펙을 갖춘 유명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내민 이력서는 어떠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고상한 지식 이외에는 배설물로 여김. 예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모름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그를 무명한 자로 여겼습니다. 세상이 멸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그도 이 세상으로부터 무시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알아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유명한 자로 알려졌습니다. 신약 성경 13권을 기록하고 2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는 유명한 자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때마다 위험을 무릎 썼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말합니다. 그는 심한 고생으로 살 소망까지 끊어진 때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가능성과 환경의 가능성이 아니라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억눌리고 죽임 당하는 현실에서 살아서 역사하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네 번째로,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징계는 하나님께서 자녀를 자녀답게 만들기 위해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귀하게 사용하시기 위해 혹독하게 징계했습니다. 오히려 그 징계를 통해 더 빛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작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작품 만들기였습니다.

 

다섯 번째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때로는 근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를 보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가운데 평생을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하였습니다. 감옥 속에서도 찬송을 하였습니다. 빌립보서에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감옥에서도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로,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세상 재물의 관점에서 볼 때 빈곤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인 보화를 주었습니다. 복음은 가장 큰 보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큰 부요함입니다. 이 분을 소개시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부요한 삶을 살도록 하였습니다.

 

제가 부산에서 목회할 때 권순연 집사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자기 집도 없고, 가난하게 사시는 분이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부모와 조카를 뒷바라지 한 천사 같은 분이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식당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나이가 예순이 넘어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분은 여름이 되면 꼭 보약을 지어왔습니다. 정말로 받기가 민망했습니다. “집사님 형편도 넉넉지 않은데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하면 이분은 어김없이 하는 말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부자여서 저도 부자입니다.했습니다. 단순히 보약만 먹은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사랑을 먹었습니다. 때로는 보약 먹다가 감사해서 울었습니다. 저는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이 말씀을 읽을 때면 그 집사님이 생각나곤 합니다. 여러분, 돈 있다고 부자 아닙니다.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바울이 바로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일곱 번째로,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바울은 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집이나 돈, 재물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입니다. 이 세상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은 하나님의 상속자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바울만 이렇게 산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욕됨을 장차 다가올 영광으로 여기고 걸어갔습니다. 세상이 이런 사람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믿음이 로마제국을 무너뜨렸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런 사람들은 세상도, 권력도, 폭력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죽이면 죽는 자리에 기꺼이 들어가는데 그런 사람을 무엇으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십자가요 또한 무덤에 장사 됨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죽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살아서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욕됨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그것은 영광이 되었고, 부활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산상수훈 팔복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 계신너희 상이 큼이라.영광과 욕됨은 우리 삶 속에서 경험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입니다. 주님을 위한 욕됨은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변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영광과 욕됨이 교차하는 인생에서 지속적인 영광을 요구하지 말고, 욕됨을 거부하지도 마십시오. 오히려 욕됨의 신비, 삶의 십자가를 통해 진정한 영광을 누리는 법을 배우십시오. 주님을 위한 욕됨은 우리의 눈을 변화시켜 하나님나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욕됨을 영광으로 변화시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기로 소원하는 갈릴리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가득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