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난다, 그 오솔길
(예레미야 2:1-13, 계 2:1-7, 요 21:15-19)
빈센트 반 고호가 프랑스에서 살던 어느 날 해변에 위치한 화실에서 저물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꿈틀대는 태양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고호 옆에서 조수로 일하던 여학생이 석양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넋 나간 모습으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고호에게 “선생님, 저 지금 집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했습니다.
“아니 그림 그리다가 말고 왜 갑자기 집엘 가려는가?” “선생님, 제가 집에 가서 식구들에게 저토록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라고 얘기해 주고 오겠어요.” 고호는 그런 그녀를 향해 “그럴 필요 없네. 석양은 거기에도 있을 것이고, 네가 말해 주지 않더라도 볼 게 아니냐?” 그때 여학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나는 한 번도 저토록 아름다운 석양을 본 적이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눈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요, 귀가 있다고 듣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볼 수 있게 하는 그 누가, 무엇을 들을 수 있게 하는 그 누가 곁에 있어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조수에게는 스승인 고호가 있어 아름다운 석양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고호가 없었다면 그녀는 그런 노을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주님이 내 곁에 있어 아름다운 석양을 보고 있습니까? 주님이 내 곁에 있어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다른 눈으로 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 모두가 다른 눈으로 인생을 해석했습니다. 때로는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고, 때로는 넘지 못할 벽을 넘고, 때로는 세상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시편 시인은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우리와 이 시인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분이 내 곁에 있느냐? 없느냐? 이 차이입니다. 시인의 곁에 주님이 있어서 보이는 것이 달랐고, 들리는 것이 달랐습니다. 내 인생에 그분을 모셨습니까? 혹은 그분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그분을 멀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증거 하는 오늘 말씀의 주제는 사랑과 배신입니다. 사랑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배신의 주체는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서로에게 순정을 바쳐 아름다운 사랑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마음이 변하여 하나님을 배신했고, 하나님은 저들에게 첫 사랑을 상기십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청년의 때의 인애와 네 신혼의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닫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제가 예언서를 읽을 때마다 유감이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서는 시로 되어 있어 하나님을 향한 영적 감수성이 생생하게 살아서 꿈틀대는 느낌으로 확 다가옵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은 시가 아니라 산문으로 아주 맛없이 번역했습니다. 저는 신학교 다닐 때 특별히 예레미야서를 히브리어로 원전강독을 했습니다.
이때 읽은 오늘 본문은 예언서지만 연애편지처럼 느껴졌고, 사랑하는 사람의 창가에서 부르는 세레나데처럼 들렸습니다. 너무도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부르는 슬픈 사랑의 노래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옛날에 들었던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생각난다. 그 오솔길 그대가 만들어 준 꽃반지 끼고.” 저보다 6살 위인 누나가 LP판으로 듣던 가수 은희씨가 부른 “꽃반지 끼고”라는 노래입니다. 제 누나가 이 노래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자신의 이름 해숙이 대신에 예명으로 은희라고 불렀습니다. 저도 누나가 좋아하는 노래를 무심코 듣다보니 이 노래가 기억이 났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을 추억하며 부르는 하나님의 “꽃반지 끼고”입니다. 히브리어는 우리말과 순서가 반대입니다. 그래서 시로 읽을 때 운율과 느낌이 확 다가옵니다. 2절은 이렇게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기억난다. 네 젊은 날의 순정이. 생각난다. 신혼 시절 너의 사랑이.” 첫 사랑을 기억하는 하나님의 “꽃반지 끼고” 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연애시절을 기억합니다. 이스라엘의 풋풋하고 순수했던 처녀 시절의 신실과 신혼시절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저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했는지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어디를 가든 뒤따랐고, 함께 했고, 동행했습니다. 그러자 반석이 갈라져 생수가 나오고,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려오고,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기적과 같은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유일하신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서로에게 너무도 아름다운 추억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의 흔적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더 이상 어떤 것도 구하지 않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랐고, 그래서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신앙의 흔적들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그리움과 상실한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마치 빛바랜 신혼사진을 펼쳐놓고 자기를 떠나버린 신부를 그리워하는 신랑의 모습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부로 집도 없고,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았던 광야에서 하나님과 아름다운 첫사랑을 나누었는데 이제는 가버린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신랑 하나님은 신부 이스라엘을 끔찍이도 사랑했고, 아꼈습니다. 신부 이스라엘은 신랑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귀한 존재였습니다. 모든 것 가운데 넘버 원, 첫 손가락에 꼽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해치려는 자가 있다면 신랑이 하나님이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자기 이름을 걸고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고 지켜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렇게 금실 좋던 부부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신부가 이상했습니다. 신랑을 멀리하고 신랑을 찾지 않더니 급기야 누군가와 눈이 맞아 딴 살림을 차렸습니다. 예레미야는 이것을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신 바꿔치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 바꿔치라는 말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저도 처음 듣습니다. 어느 예언자도 이런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드라마를 통해 신생아 바꿔치기는 많이 보아 잘 알고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래도 없는 신 바꿔치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남의 나라 땅에서 종살이 하며, 아이도 마음대로 낳지 못해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나일 강에 빠뜨려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민족을 건져내었습니다. 애굽의 모든 장자들이 죽임을 당할 때 어린 양의 피를 발라 죽음의 사자가 히브리인의 집을 뛰어넘게 하시고, 홍해 바다를 갈라 저들을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시고, 사막과 사망의 그늘진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고 기름진 땅으로 인도하여 아름다운 소산을 먹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야훼 하나님을 버리고 신 바꿔치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헛것을 좇다가 헛것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신 바꿔치기를 한 결과입니다. 이런 처참한 결과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여인의 남편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람의 감정으로는 보복하든지, 아니면 보복도 사랑이 남아있는 감정이라 여기며 잊어버리려고 애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순수했던 이스라엘과의 그 첫사랑을 절대로 잊지 않으십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첫사랑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멀리 떠났어도 그를 특별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각난다. 그 오솔길 그대가 만들어준 꽃반지 끼고” 연인을 잃은 하나님의 슬픔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행복합니다. 그 소중한 기억을 잊지 않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그 시절을 까맣게 잊고 살아갑니다. 바알의 품에 안겨 살아갑니다. 그러나 소중한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비극은 없습니다. 요양원에 계신 어른들을 심방하고 돌아올 때면 마음이 짠합니다. 많은 분들이 치매가 와서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잠시 심방하는 동안 저를 향해 “누구십니까?” 여러 번 물어봅니다. 그마나 자식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다행입니다. 심한 경우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딸에게도 “누구십니까?” 묻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는 영적 치매가 우리 인생을 비극으로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이 내게 찾아오셨는데 하나님을 몰라보고 “누구십니까?” 말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이미 영적으로 죽은 생명입니다. 장롱 속에 넣어두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꺼내어 오늘의 삶에 재해석하지 않으면 우리 또한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사순절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빛바랜 사진을 꺼내어 오늘을 재해석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잊었을까요? 잊은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사는 것은 아닐까요? 사순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선명하게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십자가의 기억이 선명해지는 시간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꽃반지 끼고”에 상응하는 노래를 불러야 마땅한 절기입니다.
광야시절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 어느 시절보다 행복했고, 아름다운 시절이었습니다. 이 광야시절의 신앙을 특징짓는 단어가 “하나님을 따랐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로는 “%l{h'”(할라크)인데 걷다, 따르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우리와 다른 문화적 배경을 이해할 때 선명하게 다가오는 말입니다. 유목생활에 익숙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목자가 앞서서 가면 양은 뒤를 따라갑니다.
여기서 따르다 “%l{h'”은 목자 뒤를 따라가는 양을 연상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따른다는 말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사실 신앙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내가 앞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실 때 “나를 따르라.” 한 말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뒤를 따라간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예레미야 2장에만 해도 5절, 8절, 23절, 25절에 네 번이나 따르다는 말이 나옵니다. 저들이 따른 것이 무엇입니까? 헛된 것을 따랐고, 무익한 것을 따랐고, 바알의 뒤를 따랐고, 이방신들의 뒤를 따랐습니다. 헛것을 따르다 헛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직도 저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보내 옛적의 사랑을 다시 들려줍니다. “기억난다. 네 신혼 때의 사랑을 생각나다. 신혼시절의 너의 사랑이.” 기억하다, 생각하다는 히브리말은 “rkz”(자칼)인데 아주 의미가 깊은 단어입니다.
성경에는 이 단어가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여호와께서 한나를 생각하신지라” 물론 단어로는 생각한다, 기억한다는 말로 번역할 수 있지만 저는 이렇게 번역하고 싶습니다. “가슴 속에 꼭 넣어두고 잊지 않고 있다. 나는 잊어버렸는데 하나님은 나를 잊지 않았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기억난다, 생각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기억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아시는지요? 자살을 시도하던 사람이 어머니에게 받았던 사랑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을 바꾸어먹었습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도저히 일어설 희망이 없는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던 그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섰습니다. 기억에 바탕을 둔 체험적인 신앙은 고난 가운데서 빛을 발합니다. 좋은 기억을 많이 가진 사람이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기억을 많이 가진 사람이 영혼의 부자입니다. 저는 갈릴리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기억을 많이 가진 영혼의 부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세기에 사상적인 전환을 깊이 한 사람을 꼽으라 한다면 저는 첫 번째로 솔제니친을 꼽을 것입니다. 그는 공산주의라는 이념에 매료되어 소련 공산당 혁명에 적극 가담했습니다. 그러나 공산 독재를 추구하는 스탈린을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는 이유로 8년 동안 강제노동 수용소에 보내졌습니다. 그는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뒤 이렇게 말합니다.
“반세기전 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이 러시아를 휩쓴 큰 재앙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에 이 모든 비극이 생긴 거야. 그 후로 나는 50년 가까이 러시아 혁명사를 연구했습니다. 만약 6천만 명에 달하는 우리 민족을 삼킨 그 파괴적인 공산혁명의 주원인을 간결하게 말하라고 하면 나는 그때 어른들이 말한 것과 똑같은 말로밖에는 더 정확하게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즉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에 이 모든 비극이 생긴 것입니다.”
한 개인뿐만 아니라 시대정신도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교회도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의문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타락하는 이유입니다.
사도 요한은 에베소교회를 향해서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노라.”고 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성경에 언급 되고 있는 여러 교회 중에 갈릴리교회와 가장 많이 닮은 교회입니다. 선교학으로 보면 바울이 에베소교회에서 목회한 것과 갈릴리교회의 이주노동자 선교가 거의 같은 패턴입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수도였습니다. 지방의 많은 노동자들이 에베소로 몰려들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선교를 시작하면서 선교정책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그전까지 바울은 각 지역을 방문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안디옥,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등 소아시아와 유럽을 순회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에서는 지역을 순회하는 선교를 하지 않고 각 지방에서 몰려 온 이주민들과 노동자들을 선교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두란노 서원을 세우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때 에베소교회는 바울이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아낌없이 후원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는 저들이 얼마나 수고했는지를 알고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라고 했습니다. 우리교회처럼 이주노동자들을 형제로 대접하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행위만 남고 믿음과 정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옛날처럼 똑같이 수고합니다. 옛날과 똑같이 봉사합니다. 그런데 그 속에 믿음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속에 진정으로 마음을 낮추어 섬기려는 마음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믿음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힘이 되어야 하는데, 사랑이 선교를 이끌어가는 힘이 되어야 하는데 믿음과 사랑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이념논쟁 하듯이 옛날 이야기합니다. 정작 자신이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을 잃어버린 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사랑과 겸손과 봉사를 잃어버리고 갈릴리정신 운운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에베소교회를 책망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첫 사랑이 소중한 이유는 감정적으로 뜨겁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첫 사랑이 진짜 좋은 이유는 모든 것이 좋게 보이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첫 사랑은 갈등과 차이도 사랑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갈등과 차이를 사랑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살면서 성경 해석도 잘 해야 하지만 인생 해석도 잘해야 합니다. 인생 해석은 의외로 어렵지 않습니다. 사랑을 바탕으로 해석하면 절대 잘못된 해석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에서 그런 사랑을 찾기가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갈릴리교회가 변질된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책망하실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행위는 남아있는 있는데 믿음과 사랑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베소교회와 우리교회가 가장 많이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 가난한 자와 이웃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했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아무 조건, 아무 자리 요구하지 않고 순수하게 일했던 그 믿음, 그 사랑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제자의 자리를 포기하고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로 살아가는 베드로를 찾아가신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얼마나 할 말이 많았겠습니까? 배반했다고 책망도 하고 싶었겠지요? 왜 낙망하고서 물고기 잡고 있느냐고 꾸중도 하고 싶었겠지요?
그러나 주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딱 한 가지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한번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이 오늘 우리에게 있는지, 그 사랑이 우리 교회에게 있는지 묻고 계십니다. 이때 우리도 베드로처럼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거침없이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해인 수녀의 시 한편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나에게서 당신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가난뱅이 여인
나에게 당신을 옷 입히면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는
궁전의 여인
하느님
아무래도 당신은
기적의 신(神)입니다
보이지 않는 당신이
순간마다 내 안에 살아오시니
내가 감히 당신을 사랑하다니
당신은 물입니까
당신은 불입니까
당신은 바람입니까사랑하는 자에게만
사랑으로 탄생하는
사랑의 신이시여
가장 짧은 말로
가장 깊은 기도를
바치게 하소서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오늘은 사순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주님과 함께 앉아서 붉게 타는 석양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의 손을 붙잡고 오솔길을 걸으며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고백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끼워주는 꽃반지 끼고 그 사랑을 날마다 확인하며, 나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기로 소원하는 갈릴리 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