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24 나는 이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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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웃입니까?

(11:1-8, 1:26-27, 10: 25 37)

 

세상의 모든 법은 어떤 범법 행위가 있을 때, 벌금을 물리든지, 감옥을 가게 하든지, 법에 따라 처벌합니다. 법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규제하는 것으로, 해야 할 것은 잘 규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법은 소극적인 차원입니다. 그러면 적극적인 차원의 법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라. 남을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법으로 명문화 할 수가 없습니다. 범위가 워낙 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반 법 정신과는 다르게 남을 도와주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는 유일하는 법이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입니다. 이 법은 미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는데 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4313뉴욕 주 퀸즈시에 살던 캐서린 제노비스라는 28살의 여성이 야간당번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이었습니다.

 

이때가 새벽 3시 쯤 되었는데, 그녀의 뒤를 따라서 걷고 있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인적이 없는 주택가에 이르자 강도로 돌변하여 제노비스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했습니다. 제노비스가 다급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자 그 주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불을 켜고서 사건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이 그 여자를 내버려 두시오!고함을 치자 강도 모즐리는 도망갔습니다.

 

이때 서른여덟명이 이 사건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도와주겠지 하고, 아무도 나와서 도와주지 않고 방관했습니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무려 서른여덟 명이 말입니다. 이 사이 강도 모즐리는 다시 나타나 가게 앞에 누워있는 제노비스를 성폭행했고, 처참하게 살해했습니다. 이 살인사건은 1964년 새벽 315분부터 50분까지 약 35분간 계속되었는데 그 어떤 사람도 이 여인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사건이 끝나고 서른여덟명의 목격자 중 한 사람이 경찰에 신고했으나, 이 여인의 목숨은 이미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다음날 뉴욕 타임즈 신문에 실린 대문짝만한 기사는 미국인의 가슴에 경종을 울렸습니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 생명이 경각에 달린 사람을 보고 방관하는 인간성을 보고 전 미국인들이 탄식을 하며 이 여인의 이름을 딴 제노비스법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The Good Samaritan Law)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은 미국뿐만 아니라 유렵 대부분의 국가들이 시행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이디오피아까지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 법을 가장 강력하게 시행하는 나라는 프랑스입니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조할 수 있는데도 고의로 기피한 자는 5년 이하의 구금에 처하는 강력한 법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호수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서도 자리를 피했다는 이유로 당사자가 익사하지 않았음에도 3년형을 선고한 사례가 있습니다. 보다 유명한 사례가 있습니다. 영국의 다이애나 비가 사망했을 때 일입니다. 다이애나는 1997831일 프랑스 파리에서 연인인 도디 알 파예드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집요하게 추격해오는 파파라치들을 피하는 과정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고로 그녀는 연인과 함께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사고 당시 구조하기에 여념이 없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사고현장의 처참한 모습을 사진 찍기에만 급급했던 몇몇 파파라치들은 결국 프랑스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고, 형을 살았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이 법을 시행하고 있지 않는데, 빨리 이 법이 제정되어 시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법으로 정해도 이것은 뚜렷한 한계가 있습니다. 사랑을 법으로 강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서구 여러 국가는 왜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을 시행하고 있을까요? 사랑과 정의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법 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정의는 하나님께 뿌리를 둔 두 얼굴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사랑과 정의입니다. 이 둘을 분리시켜서는 안 됩니다. 분리하면 사랑은 감상주의적이 되고 정의는 비인간화됩니다. 사랑은 감정적으로 좋아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따라서 사랑은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요, 행위의 문제입니다.

 

이제 사랑과 정의가 한 뿌리라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묻습니다. 영생을 물었습니다만, 영생을 얻기 위해 애를 썼다거나 깨닫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질문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했습니다. 질문의 의도가 고약한 것이지요. 우리식으로 말하면 간보기 위해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 간보기 위해 질문하면 대답하고 나서도 기분이 찝찝합니다. 더군다나 교회에서 목사의 마음을 간보려는 사람을 만나면 솔직히 대답하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을 간보려는 저들의 속내를 뻔히 아는 데도 진실하게 응답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었느냐?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수준 높게 대답 한 것입니다. 계명을 쭉 나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율법사답게 율법을 둘로 요약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리해서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 예수님의 말씀은 이 율법사의 가슴을 비수로 찌르는 말씀이었습니다. “네 대답이 옳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간단하게 대답을 끝내 버리셨습니다. 귀가 열린 사람이라면 이 정도 말씀하시면 아는 것보다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중요하구나!’ 하고 하고 그냥 돌아갔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끝까지 남아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내 이웃입니까?”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질문했겠습니까? 본문에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쉽게 말해 자기 자랑하려고, 자기는 이웃 사랑의 계명을 잘 지켰기 때문에 그것을 자랑하려고 질문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웃 개념은 편협합니다. 다른 민족을 이웃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다른 민족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요 개 같은 사람들일 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자기와 비슷한 사람만 이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율법교사에게는 나의 이웃이란 적어도 나와 수준이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나만큼 율법을 지키고, 나만큼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이웃입니다. 내가 그런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자랑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두 가지 계명,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셨을 때, 이웃은 율법교사와 이스라엘의 경건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레위기 율법이 말하는 이웃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였습니다. 베푼 사랑을 돌려받을 수 없는 사람이 이웃이었습니다.

 

신앙이 늙으면 본질이 변합니다. 자기 편한 쪽으로 해석합니다. 우리도 이 점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을 말하는데 대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대상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이 누군가를 향한 배타와 혐오로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우월감과 독선까지 더해졌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제가 아주 독특한 책 한 권을 읽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크로아티아 신학자 미로슬라브 보프가 쓴 배제와 포용이라는 책입니다. 우리는 크로아티아하면 동유럽의 관광하기 좋은 나라, 꽃 누나 여정 따라 여행하기 정도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역사를 알고 나면 우리 민족이 겪었던 침입과 시련보다 더 혹독한 역사를 경험한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더군다나 유고 연방에 편입되어 인종 학살과 종교적 학살까지 경험하다가 지난 1991년 독립한 나라입니다. 보프는 크로아티아에서 겪었던 참상의 경험을 바탕으로 왜 인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배타와 혐오를 깊이 있게 지적합니다.

 

그는 신앙의 숭고한 가치인 구속,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이 배타와 혐오를 양산한다고 지적합니다. 내가 죄로부터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죄인을 멀리하고 혐오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경건한 사람은 죄인을 멀리해야 된다고 교육받습니다. 그런데 죄인이 누구입니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경건한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카테고리 지은 사람들은 사회에서 추방된 사람, 천대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 몹쓸 질병에 걸린 사람, 이방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아우르는 말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자신을 이런 사람들과 자신을 분리시켜야 했습니다. 이들은 결코 이웃이 될 수 없었습니다. 종교적 경건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배타와 혐오를 낳은 것입니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더 큰 악을 행하고 말았습니다.

 

보프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배제시키고, 학살하고, 죽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했습니다. 신앙이 잘못되면 우리만 구속받았다, 우리만 성민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배제하고 우월감과 독선에 빠지게 됩니다. 죄인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포용은 온데간데없고, 신앙의 이름으로 타인을 배제하고 왕따를 시킵니다. 이런 행위에 대해 반성과 회개도 없고, 오히려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합니다.

 

보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내 이웃이냐는 질문은 누가 내 이웃이 아니냐는 질문과 같습니다. 누가 이웃인지를 판단하는 순간 누가 내 이웃이 아닌지 결정됩니다. 사랑하라는 명령이 누군가를 미워해도 된다는 꼴이 됩니다. 만일 그 판단의 기준이 신앙이라면 우리는 신앙의 이름으로 우리는 이웃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더 큰 죄를 짓고 있습니다.말했습니다. 너무 깊이 있는 통찰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강도만난 사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자는 교훈 정도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 신앙이 누군가를 배제하지는 않는지, 우리의 신앙이 누군가를 따돌리지는 않는지, 누군가를 배타적으로 대하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내가 말하는 이웃 사랑이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차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를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누군가를 신앙의 이름으로 배제시키고, 우월감과 독선에 빠져 있는 당시 종교 분위기에 대해 도전적인 비유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의도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지금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 경건 유지하겠다고 모른 척하는 것은 죄짓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경건한 사람들이 배타와 혐오로 대했던 사람이 조건 없이 사랑했으니 너희도 이 사람을 본 받으라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봅시다. 먼저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보고는 그냥 지나갔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누구입니까? 백성을 대표해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다가 그가 죽기라도 하면 시체를 만진 것이 되어 성전 봉사를 할 수 없게 됩니다. 구약성경 레위기에 보면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서 저녁까지 성전 봉사를 못했습니다. 당시는 성전 봉사자의 수가 많아서 그야말로 오래간만에 봉사의 기회가 돌아옵니다. 자칫 잘못하면 강도 만난 자를 도왔다가 성전봉사의 기회를 놓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율법과 달리 이들의 잘못을 신랄하게 지적합니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 성전 봉사가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중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말씀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죽어가는 사람 불쌍히 여기고 살려주는 것이 성전에서 하나님 섬기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죽어가는 자를 외면했습니다. 하나님의 두 얼굴은 사랑과 정의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지 않는 사랑과 정의를 행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일을 하라고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사람을 사랑하고, 정의를 행하는 본분을 잃어버렸습니다. 목사와 장로와 권사라는 직분이, 사랑과 정의를 버리게 만들었습니다. 종교적 경건이 누군가를 배제했습니다. 누군가를 따돌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종교적 우월감마저 가졌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의 백성으로, 그리스도인으로 불렀습니까? 사랑하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이 땅 사람에게 보여주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이유입니다.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경건하다고 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죄인이라고 낙인찍어 배제시켜놓은 사마리아인은 어떻게 행했습니까?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갔습니다. 이것 따지지 않았고, 저것 붇지 않았습니다.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죽어가고 있으니 무조건 살려놓고 보겠다는 마음입니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습니다. 이튿날 데나리온 둘을 주인에게 주면서 강도 만난 자를 부탁하고, 돈이 더 들면 올 때 갚겠다고 약속하고 떠났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 사람은 사회적으로는 열등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이방인들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사람 취급하지 않고, 상종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배타와 혐오의 대상이었던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켜, 바로 이 사람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다, 진정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다음 율법사에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느냐?” 그가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처음에 율법사는 누가 내 이웃입니까?”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고 묻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 이웃이 누군지 묻지 말고 네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라는 뜻입니다. 이웃을 찾을 것이 아니라 네가 이웃이 되어라. 너희들이 도무지 이웃이라고 생각지 않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참 이웃이 되어주었다. 이 사람처럼 너도 이웃이 되어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웃의 개념을 바로 해야 합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가 아닙니다. 누가 나와 통할 만한가도 아닙니다. 누가 내 이웃이 될 만한가,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내 눈에 보이는 어려운 사람이 내 이웃입니다. 어려운 일에 처한 사람이 내 이웃입니다. 내 주위의 강도만난 자, 그래서 누구든지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 내가 그에게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다시 본문 처음 말씀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냥 선행을 베풀라는 뜻이 아니라 영생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율법사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그렇다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와 같이 하는데 영생의 길이 있다는 뜻입니다.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를 사랑하는데 영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교리적으로 말하면 영생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무엇이 살아 있는 믿음입니까? 야고보서의 기자의 증언에 의하면 행함이 있어야 산 믿음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으로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했던 야고보 사도는 경건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라.했습니다.

 

우리는 경건을 소극적인 의미에서만 생각합니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만으로 경건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적극적인 경건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돌려받을 수 없는 사람, 고아와 과부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의 경건이 자기를 지키는 수준에만 머물러 있으면 우리는 또 다른 바리새인입니다.

 

왜 우리가 사순절 세 번째 주일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사순절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고 자기를 성찰하고 회개하는 절기만이 아닙니다. 한걸음 더 나가 적극적인 경건을, 사랑을 실천하는 계절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기 경건에만 머물러 있다면 우리 또한 바리새인입니다. 죽은 믿음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늙으면 나타나는 현상이 신전종교화 되어갑니다. 이미 한국교회도 신전종교화 되었습니다. 신전종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신전을 화려하게 짓고, 제물이 가득하고, 드리는 것만큼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두 얼굴인 정의를 행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종교와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확연하게 구별되는 점은 하나님과 관계만큼 이웃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분리 될 수 없는 동등한 가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경험하고, 광야 40년 동안 인도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따끈따끈한 신앙을 가졌을 때는 가난한 자를 사랑하고, 정의를 행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했습니다. 그러나 저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먹고 살만해지자 하나님을 버리고 신전종교에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신전종교가 무엇입니까? 바알 신이고, 아세라 신입니다. 바알 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을 행하더라도 회개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세라신은 아무리 욕심내고, 탐하더라도 꾸짖지 않고 오히려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사회에 정의가 무너지고, 가난한 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야훼 하나님의 귀에 상달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보내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다시 강조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신전종교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 신앙입니다.

 

한 사람 이야기 들려 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미국 오하이오 주 라이트 대학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차인홍교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대전에서 태어났는데 2살 때 소아마비에 걸렸습니다. 그는 아홉 살에 성세재활원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교육을 받고 성장합니다. 차인홍은 노래를 부르기를 좋아했고, 음악적인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을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그가 바이올린을 처음 만난 사건이었습니다. 서울 유명 음대를 나온 강민자 선생님이 유성온천을 들렀다가 재활원을 보고 발길이 이끌리는 대로 들어갔습니다. 재활원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 보고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제안을 합니다. “제가 여기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연주와 강의로 바쁜 사람이 대가도 받지 않고 가정 형편이 어렵고 몸도 불편한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첫 수업 때 차인홍은 바이올린을 난생 처음 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면 소리가 나지. 이 악기를 바이올린이라 불러요.하는 강 선생의 말씀을 지금도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강 선생의 재활원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차인홍이라는 교수요, 지휘자를 낳은 것입니다. 세상에 사랑만큼 보람 있는 것은 없습니다. 돌려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물 위에 식물을 던지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져서 세상을 변화시키게 됩니다. 메아리가 되어 우리에게 반드시 돌아옵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사순절 세 번째 주일 배타와 혐오를 당연시 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너는 지금 누구의 이웃이 되고 있느냐? 여러분은 누구의 이웃이 되고 있습니까? 내가 베푼 것을 돌려받을 수 없는 사람을 이웃으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낮추어서 극진히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두 얼굴 사랑과 정의요, 우리가 실천해야 할 적극적인 경건이요,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이 땅을 살아가기로 소원하는 갈릴리 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