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사 1:10-17, 빌 3:7-14, 막 8:27-38)
사람은 떠날 때가 다가오면 그 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주위 사람들에게 하곤 합니다. 더군다나 죽음의 때가 다가오면 꼭 하고 싶은 말, 반드시 남기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의 시간을 안다면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남기고 싶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꼭 남기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 기간 대부분을 가난과 소외의 땅 갈릴리에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종교적 정치적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에 의해 죽음을 당할 것을 아셨습니다.
인간의 무서운 점이 바로 이점입니다. 기득권을 지키는데 방해가 된다면 하나님이라도 죽일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서로 원수지간으로 지내던 사람들도 자신들의 기득권이 도전 받는다고 생각하면 연합합니다. 바리새인과 제사장 견원지간이 연합했습니다. 이들은 또한 자신들을 식민통치하는 로마 권력과도 연합했습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런 측면으로 본다면 기득권을 지키려는 열망은 거의 종교적 수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운명도 아셨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사악함도 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으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한 자리 차지 할 줄 생각하고 마음이 들떠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동상이몽이라 말하고, 떡 줄 사람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먼저 마신다고 말하지요. 예수님의 고민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자들의 헛된 꿈을 깨고 제자의 길을 걷게 할 것인가? 이것이 주님의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꼭 남기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드디어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십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가려고 하면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정반대 방향인 북쪽, 가이사랴 빌립보를 향해 올라가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헤롯왕이 북쪽 변경에 세운 로마식 신도시입니다. 이 도시에서 유명한 건물이 있었는데 판테온 신전입니다.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과 유사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신들을 경배하는 만신전입니다.
예수님은 으리으리한 만신전이 내려다보이는 빌립보 언덕에 제자들을 세우고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은 세례 요한, 어떤 사람은 엘리야, 어떤 사람은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굉장히 직설적인 질문이기도 하고, 면전에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입니다.
이때 수제자인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면서 남쪽으로 향하지 않고 이곳에 온 이유가 바로 제자들로부터 이 신앙고백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신을 모셔놓은 화려한 만신전 앞에서 제자들의 신앙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방향을 바꾸어 가이사랴 빌립보까지 올라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때서야 발걸음을 남쪽 예루살렘을 향해 돌리십니다. 그리고 심각한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음을 당할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듣는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너무도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3년 동안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던 꿈이 산산조각 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풍랑이는 바다를 말씀 한마디로 잔잔케 하셨습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살리셨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힘 있고, 능력 있는데 힘과 능력 발휘하지 않고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임금으로 등극하시고 나라를 다 평정하실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능성 믿고 3년 동안 가정도 생업도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으신다고 하니 얼마나 큰 충격이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첫 번째 수난예고이고, 연거푸 세 번씩이나 하십니다. 왜 예수님은 한번만이 아니라 무려 세 번씩이나 수난예고를 하셨을까요? 헛된 야망으로 불타고 있는 제자들의 가슴에 의도적으로 찬물을 확 끼얹으신 것입니다. 꿈 깨라고 말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 “선생님, 지금 도대체 무슨 말씀 하시는 것입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에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여기서 재미있는 대목은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용하신 단어가 똑같다는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향해 꾸짖고, 스승은 제자를 향해 꾸짖습니다.
32절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다고 되어있는데, 항변하다는 헬라말은 evpitima,w(에피티마오)입니다. 꾸짖다. 질책하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으며 만류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33절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었다고 말씀하는데 32절의 단어와 똑같은 단어 evpitima,w(에피티마오)를 사용했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길을 막기 위해 꾸짖고, 스승은 자기 길을 막는 제자를 꾸짖고 있습니다. 어찌 제자가 스승을 꾸짖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무례하게 행동하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눈여겨 볼 대목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했는데 헬라 말로 직역하면 “내 뒤에 있으라!”, 영어성경은 원문 그대로 “Get behind me” 번역했습니다. 네 자신을 나보다 앞세우지 말라. 자기 생각 앞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면서 첫 번째 들려주신 말씀이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내 뒤에 있으라!”는 말씀과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은 “나보다 앞서서 사탄 짓 하지 말고 내 뒤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향해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바로 직전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너는 복이 있도다. 너는 이제부터 베드로다.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 칭찬과 동시에 영적인 축복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사탄아!”라는 책망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여기에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사이에서 자기 욕망 때문에 유혹받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지 않고 자기 생각, 자기가 좋은 것, 자기에게 유리한 것 따라가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됩니다. 마귀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생각 앞세우면 마귀가 그것을 이용해서 사람의 눈을 멀게 합니다. 나중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의 앞잡이가 됩니다. 그래서 자기 뜻을 앞세우는 베드로를 사탄이라 말한 것입니다.
제가 부산에서 목회할 때 부임한 지 6개월 정도 밖에 안 되었고, 위임도 받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60세 이상 된 1남선교회 회원들이 나들이 갔다 온 문제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주일에 교회 안에서 유혈 전투까지 벌어져서 한분이 심하게 다쳐서 28 바늘을 꿰매었습니다. 35년 동안 분쟁이 있었던 교회인데, 나들이 가는데 자기에게 알리지 않고 갔다고 옛날 감정까지 동원시켜 폭발한 것이지요.
이 정도 되었으면 사건의 당사자나 1남선교회 회장은 담임목사인 저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지요. 그런데 하루 이틀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전화를 들까 망설이다가 금요일이 지나갔습니다. 토요일 새벽 하나님께서 “이것은 저들의 잘못을 넘어서서 담임목사인 네 잘못이다.” 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 사과 한 마디 없는 사람이 교인입니까?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교회의 모든 일은 담임목사 책임이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담임목사는 무한책임이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일 광고 시간에 “지난주일 1남선교회에서 있었던 불미스런 일에 대해 아무도 잘못한 사람이 없다고 하니, 하나님이 담임목사인 제 잘못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다음 주일 강단에 설 때까지 바깥출입하지 않고 목양실에서 1주일 간 금식기도 하겠습니다. 그리고 1남선교회실은 당분간 폐쇄합니다.” 했습니다.
1주일간 금식기도가 끝나고 주일 예배도 끝났습니다. 처음 찾아온 분이 누구였을까요? 폭력을 가했던 사건의 당사자였습니다. 이분이 처음 꺼낸 말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금식기도하시면 교회 앞에 나는 뭐가 됩니까?” “나는 뭐가 됩니까?” 하나님께서 저에게 금식기도 하라고 하신 이유를 그때 알았습니다. 교인으로 인해 담임목사가 시험 들지 말라고. 교회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하나님 생각, 교회 생각은 하나도 하지 않고 “나는 뭐가 됩니까?” 자기 생각만 합니다.
여러분이 이것이 마귀가 하는 짓입니다. 하나님 생각하지 않고, 교회 생각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하나님 뒤로 가야하고, 자기 판단이 교회 뒤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이 죽으면 나는 뭐가 됩니까?” 하면서 예수님을 꾸짖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호되게 꾸짖은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일이고, 무엇이 사람의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정의와 승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죽음은 속죄의 제물로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힘들고 괴로운 길, 그러나 온 세계 만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처럼 십자가에 피 흘리심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죄를 다 속량하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면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고난의 길이요, 희생과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셔야 하는 길이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길이며, 바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는 길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일의 무엇입니까? 베드로와 제자들이 꿈꾸었던 야망입니다. 예수께서 다윗 왕과 같은 임금으로 등극하시면 한 자리 차지할 기대감이 가득 했습니다. 3년 동안 가정도 생업도 버리고 따라다녔으니 논공행상을 따졌을 때 자기들은 분명히 큰 자리 차지할 줄 알았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한술 더 뜨는 야고보와 요한이 등장합니다. “선생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심지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의 치마 바람까지 동원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자들은 “누구는 무 뿌리 먹고, 누구는 인삼 뿌리 씹을 수 있느냐?” 하면서 분개하고 다투었습니다. 제자들 모두가 자기 욕심이 가득 했습니다.
사람의 일은 자기 욕심 채우는 것입니다. 자기가 높아지고, 자기 목소리 지분 확보하고, 근본적으로 힘을 사랑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사람의 일입니다. 이것은 옛날 제자들 공동체 사이에서도 있었던 일이요, 지금 교회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이 사람의 일을 넘어설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고 교회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뒤이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리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누구든지” 단지 제자들만 아니라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말 속에 바로 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멋모르고 예수 믿었다가 예수 믿고 따르는 길이 여간 힘든 길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길이요, 고난의 길이요, 좁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더라도 적당하게 믿으려 합니다. 때로는 좁은 길이니까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길은 복된 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길은 진리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진짜로 행복한 길입니다. 마지막에 웃을 수 있는 끝이 아름다운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것 때문에 늘 유혹을 받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좁고 힘든 길을 보고서 도망가거나 회피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향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본다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주인 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기의 욕망, 자기의 개인적인 계획, 자기의 명예, 자기의 소망을 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24년 전 목사 안수를 받을 때 권면하신 목사님이 세 가지 조심하라 했습니다. 물질을 조심하라, 이성을 조심하라, 명예를 조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여전히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는 것이 이 세 가지 범주의 기도입니다. 물질에 대한 유혹은 누구나 있습니다. 목사도 사람이기에 물질에 대한 유혹이 있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가족의 삶도 염려가 되고, 노후도 걱정이 됩니다. 목사도 자녀들에게 아버지인데 재산이 없으면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큰 아들 녀석이 대학에 입학하자 두 아들을 앉혀놓고 아버지는 재산이 없으니 결혼할 때 집 마련하는 것도 너희들이 알아서 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큰 아들 녀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받는 사례비 속에는 재테크 비용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저희 살아갈 길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저는 아들에 말에 감동을 먹었습니다.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제 아들이지만 참 기특합니다. 이 아들은 제 아들에 앞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복 내려주옵소서!” 그러면서 나와 가족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자 더욱 애쓰게 되었습니다.
또 이성의 유혹도, 명예의 유혹도 있습니다. 목사는 여자들 틈에 끼여서 삽니다.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제가 선임 부목사 시절에 새로 부임한 후배 부목사가 젊은 여자 집사를 차 앞자리에 태우고 다녔습니다. 교인들 사이에 말이 났습니다. 여러 차례 말을 했는데 건성으로 듣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구역장 권찰 모임에 가서 앞으로 심방 다닐 때 부목사님이 운전하는 차 앞자리에는 60세 이상 되신 분만 앞자리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60 넘은 권사님 몇 분이 저에게 항의 하러 찾아왔습니다. “최 목사님, 60 넘은 권사는 여자가 아닙니까?” 환한 얼굴로 즐겁게 항의 했습니다. 저도 재치 있게 받아쳤습니다. “여자는 맞지만 앞자리에 앉아도 말이 나질 않을 편한 여자입니다. 권사님 사랑합니다.” 했습니다.
명예의 유혹도 있습니다. 선교회나 기관에서 활동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자리가 마련됩니다. 일과 섬김으로 인해 마련된 자리도 있지만 명예를 다툼하는 자리도 있습니다. 그런데 명예를 지키려다 예수 잃어버리는 경우 있습니다. 자기 명예 지키려다 교회를 상하게 하는 경우 있습니다. 이럴 때 명예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물질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물질을 추구하는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의 일의 일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직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쓰임 받을까?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 가 진정으로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산 사람입니다. 전 생애를 하나님께 다 드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뇌전증 혹은 심한 안질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상상한번 해보십시오. 뇌전증이라면 설교하다가 발작을 일으키고 쓰러질 수 있습니다. 설교자로서 치명적인 결함입니다.
미국의 새들백교회 릭 워랜 목사가 뇌전증입니다. 그가 설교 할 때면 부목사는 설교 원고를 들고, 간호사는 응급처치 준비를 하고 강대상 뒤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담임목사 뇌전증이라면 당장 쫓겨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담임목사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매주일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예배에 참석하는 큰 교회로 성장시켰습니다.
또한 바울이 안질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설교자가 회중들과 눈을 마주쳐야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는데 눈은 토기 눈처럼 벌겋게 충혈 되어 있고, 눈곱이 늘 끼어있고 나 보기가 역겨워 눈을 마주칠 수 없습니다. 바울의 육체적인 가시는 복음을 전하는데 십자가였습니다. 그 십자가를 벗고 싶어서 하나님께 세 번 기도했습니다. 그때 그가 들은 기도의 응답은 “내 은혜가 족하도다.”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치명적인 십자가가 더욱 더 그리스도에게 매이게 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가가 오히려 은혜라는 깨달았습니다. 은혜라도 보통 은혜가 아니라 깊고 깊어서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큰 은혜라는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기도하다가 어느 날 생각이 뻥 뚫린 것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과 온 삶으로 깨달은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서신서 본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예수를 아는 것 이외에는 배설물처럼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물질도, 나를 높여주는 명예도, 배설물처럼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예수 안에 있는 기쁨과 도저히 비교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뒤이어서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위대한 사도가 왜 이렇게 고백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안심하고 기댈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제 받은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 받을 은혜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을 맞아 스스로를 돌아보십시오. 내가 현재 섬기고 있는 일이 사람의 일인지 하나님의 일인지 분별하십시오. 교회와 하나님 앞에서 나는 뭐가 됩니까? 하면서 나를 앞세우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십시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고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 가십시오. 때로는 힘들더라도, 때로는 손해 보더라도 자기 십자가 지고 가십시오. 생명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 지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소원하는 갈릴리 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