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우를 보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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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우를 보내며......



주일 아침 8시. 예배시간에 늦을 새라 서둘러 집을 나서려고 현관에서 신을 신고 있는데 핸드폰 메시지가 왔다는 음악이 울린다. 지금 바쁜데 무슨 메세지야? 또 광고성 메시지겠지 하며 흘려 버리려다 무심코 폴더를 여는 순간 “이준호집사 소천......”

순간 내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지며 멍해진다. 내가 잘못 보았나? 다시 읽어봐도 똑같은 글자와 내용이다. 마음이 저려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용암이 터져나오듯 울컥 뭔가가 솟아오른다.


왜 우리는 소중함을 잃고 나서야 가슴치며 후회할까? 주일예배후 식사가 끝나자마자 뭐가 그리 바쁘다고 다시 세상속으로 뛰쳐 나오곤 했을까? 식당 출입구쪽에 항상 자리하고 몸이 불편하여 전동휠체어로 예배에 참석하는 이충우 집사의 식사수발을 드는 준호를 보며 곁에 다가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하지 못했을까? 봉사하며 바쁘게 지내는 그에게 시간을 빼앗는 것 같은 죄송한 마음에서 그랬을까?


설교 말씀도 준호와 관련된 ‘다시살리신 나사로’ 이야기였다. 설교말씀 중에도 그리고 찬송가를 부를 땐 감정에 북받쳐 터져 나오는 눈물 콧물은 휴지로 막을 수 있었지만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슬픔은 참기가 힘들었다. 손으로 주체치 못해 주먹으로 입을 틀어 막으며 우는 영화의 장면을 이제사 이해가 된다. 골방이라도 찾아 들어가 목놓아 꺼이 꺼이 울고 나면 조금은 시원해지련만, 계속된 속울음으로 가슴은 터질 듯 너무 아프다.


준호는 정말 행복한 놈이다. 자신의 죽음에 울어줄 이가 있으니 말이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처럼 옥토밭에 많은 씨를 뿌린 그였기에, 주님의 충성된 일꾼이였기에 그의 죽음으로 많은 이들이 진정 슬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따돌림 당함이 최대의 아픔이다. 남들로부터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인생의 최대 목표이자 삶의 의미이다. 그렇기에 인생의 성공이라 함은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닐까? 무신론자들은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가짐으로 많은 이들로부터 부러움과 존경을 받으려 하고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충성된 자로 칭찬받기를 원한다.


떠나간 준호를 생각하며, 돈도 명예도 권력도 없어 사회적으로 존경 받을 처지도 못되며 그렇다고 교회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포도원의 품꾼들 (마20:1)’과 ‘은 열므나 비유 (눅19:11)’에 나오는 충성된 종도 되지 못해 게으르고 악한 종에 가까운 나 자신을 뒤돌아 보며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2011.10.17


이준호 집사님의 소천을 바라보며 김명환 잡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