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의 발자취를 찾아서...
최순옥 권사
1부 “ 내가 만난 하나님”
갈릴리교회 시작을 말하기 전에 나와 인명진목사님과의 첫 만남을 먼저 이야기하고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 내가 대학교 3학년때 야학활동을 하고 있던 제일야학을 기회로 당시 인명진목사님이 총무로 일하고 계시던 도시산업선교회(도산)를 알게 되었다 .내가 가르치고 있던 야학학생이 모두 공장노동자들이었기 때문에 강학들과 학생들이 모두 산선20주년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처음으로 인명진목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아니 목사님이 가르치고 있는 노동자들을 만났다고 해야 맞는 표현일 것 같다. 그때 산선에서 내가 만난 노동자들은 이미 내가 도움을 주고 가르쳐주어야하는 힘없고, 가난하고 못 배운 노동자들이 아니었다.
그때 내 눈에 비친 노동자들의 삶은 나에게는 그동안 내가 살아보지 못했던 또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신세계였다. 그날을 기회로 산업선교회를 알게 되어 매주 주일마다 몰래 산선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삶, 대학3학년때까지 상상도 못했던 가슴 뛰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매주 이런저런 책들을 읽어가며 토론하고 밤을 세우며 만났던 마르크스와 체게바라...는 그동안의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그때의 들끓는 에너지와 가슴떨림이 지금의 나에게는 많이 사라진 것 같아 가끔은 삶이 공허해지기도 한다.
인명진목사님이 총무로 계시면서 도시산업선교회에서 노동자가 아닌 우리들 (속칭먹물들)은 따로 구역을 만들어주셨는데,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22구역, 직장인들은 21구역이었다. 그렇게 구역모임을 하고 야학을 하면서 산업선교회 일원이 되어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새로운 환경, 설레는 삶을 한참 신명나게 살아가고 있을때, 인명진 목사님이 호주로 떠나시게 되었고, 신철영선생님과 송진섭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우리 나름대로 계속 스터디도 하고, 야학운영도 하였지만 목사님이 계실 때 만큼 신명도 부흥도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새로 산선총무로 부임하신 손은하 목사님과 함께 여성운동을 시작 하기로 하고, 기독여민회(기독교 여성단체)를 만들어서 기혼여성노동자를 돕는 여성운동을 하게 되었다. 기혼여성노동자들의 삶을 지원하기 위해 지역사회탁아소연합회(지탁연)을 만들고, 일반대중여성들을 운동으로 끌어들이는 톰보이 불매운동, TV시청료거부운동 등 여성운동을 하면서도 뭔가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계속 호주에 계시는 목사님께 노동자는 아니지만 지식인들이 모여서 노동자들과 노동목회를 하는 후배들을 뒤에서 돕는 후방부대 즉 제3의 교회를 만들자고 호주로 편지를 보내곤 했었다. 편지를 보낼 때의 심정은 목사님이 어디에서 도둑질을 하면 망을 봐서라도 목사님이 하시는 일을 돕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만큼 목사님이 가지고 있는 신앙과 목사님의 목회방침을 지지하고 있었다.
2부 “왜 우리는 지금 또 하나의 십자가를 세우려고 하는가?“
드디어 목사님이 한국에 다시 돌아오시고 목회를 시작하시면서 3가지 약속을 하셨다. 첫번째는 교회당은 갖지 않겠다는 것, 두 번째는 교인수가 200명이 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 마지막으로 헌금의 50%이상을 사회선교를 하는데 사용 하겠다는 것이었다.
교회당을 갖게 되면 헌금이 사회선교를 하는데 사용되어야하는데 교회당 유지하는데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며, 교인이 가족과 같이 함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나누어야하는데, 교인수가 늘어나게 되면 가족과 같은 분위기보다는 기업화되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셨고, 그리고 우리교회가 수많은 교회에 십자가를 하나 더 보태는 교회가 아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는 땅으로 일구는데 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사회선교를 꼭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5년전 6월1일 첫 예배를 목동4거리에 있는 목사님 댁에서 드리게 되었는데, 참석교인은 목사님과 사모님, 조남호전도사(목사님), 한명희집사, 송진섭선생님(전 안산시장) 과 나 이렇게 조촐하게 시작하였던 것 같다.
숫자는 작았지만 마음만은 큰 교회 못지않은 각오와 다짐으로 시작하였던 예배였다. 점심식사준비도 내가 집에서 비빔밥재료를 준비해가지고 가서 같이 나누어 먹었다. 이렇게 나와 갈릴리교회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첫 예배를 드린 후에 김용복박사님이 시무하시던 산돌교회와 교회건물을 같이 사용해볼까도 했지만 여러 가지가 우리교회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구로동 여기저기 마땅한 곳을 찾으러 다녔었다. 그때부터 목사님의 생각은 목사님이 살고계시던 목동이나 부자동네가 아닌 우리나라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고, 노동자가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구로동을 선택하여 가난한 이웃들에게 경제적, 의식적 깨어남과 함께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그들의 존재를 만나도록 돕고, 그들의 진정한 이웃이 되고자 교회를 구로동에 터전을 만들게 되었고 그런 의미로 교회이름도 갈릴리교회가 된 것이다.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것이 우리갈릴리공동체(교회)이며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이 뜻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가 갈릴리교회이다 라고 이야기하셨다.
그때 나는 한국여성단체(여연)의 산하단체인 기독여민회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예수. 여성. 민중과 함께 하는 기독여민회(약칭 기여민)는 1986년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을 위해 일하려는 뜻을 가진 초교파적인 여성단체로서,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민중과 더불어 살기를 원하는 기독여성들이 연합하여 이 사회의 여성을 비롯한 소외받는 자들의 해방과 기독문화 창출을 위하여 일하는데 목적이 있다.
소외받는 여성들을 위해 사회복지를 실천하고 그 삶속에서 주님을 찾고 하나님께 언제나 예배하는 공동체를 만들었던 기독여민회(기여민)활동은 계속해도 좋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갈릴리교회사무원을 자처하여 목사님과 함께 일을 시작하였다. 지금생각하면 미친짓이지만 월급도 안 받는 사무원 일을 기억은 나지 않지만 꽤 오랫동안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구로민주항쟁이 일어났을때는 우리교회가 본부가 되어 농성을 했었고, 대통령선거때는 구로1동성당과 우리교회에서 모여서 회의를 하고 투표함지키기 활동을 밤새워 하곤 하였다.
우리가 직접 현장에 들어가지않고 밖에서 가난하고 힘든 여성노동자를 돕는 일은 탁아소를 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기독여민회(기여민)가 주축이되어 1986부터 운영하던 새터어린이집을 나와서 1988년 1월부터 갈릴리 교회에서 운영하는 희망어린이집 원감으로 어린이집 운영을 맡아서 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멤버가 이기향선생, 김민주선생, 남명자선생, 이숙경선생, 나 이렇게 다섯명이 밤을 새워가며 회의를 하고, 환경정리를 해가면서 지금의 희망어린이집이 그렇게 시작되었었다.
우리가 세우려고 하는 십자가는 무엇인가?
25년이 지난 지금도 목사님은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길 요구하고 계신다. 그러나 나는 그 삶에서 벗어나서 내삶, 아니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 한 달에 한번 내는 헌금과 몇군데 지원하고 있는 후원금으로 위안을 삼고 있는 비겁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면서 오늘도 하나님께 매달리며 약속을 하고 있다.
언젠가는 꼭 선교현장에 나가서 온가족이 봉사하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