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갈릴리로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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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4.10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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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갈릴리로 가거라

 

                              소용순 장로

 

나는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 주어진 신앙 안에서 모범적으로 자랐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곱살

에 학교에 입학 하면서부터 주일 학교에 들어가 10리 정도 떨어진 자그마한 산속의 교회에 혼자 걸어 다녔다. 아무리 더웁거나 춥거나 홍수가나고 눈보라가 쳐도 교회만은 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 하였다. 아버지는 나를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니 나는 다른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진로를 선택 할 나이에 목사가 아닌 다른 길을 택하고 말았지만 교회와 목회자에게 순종한다는 생각은 변함 없이 생활해 왔다.

그러나 서른 네 살에 외국인 회사에 근무하게 된 영향으로 미8군 성공회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우연히 나가게 된 그 발걸음이 조용히 한국 보수교회 에서 순종하며 생활하던 내게 커다란 의문을 던지고 신앙의 노선을 바꾸는 계기가 될 줄은 몰랐다. 사회적 관심은 적고 개 교회의 양적 성장만을 추구하는 모습에서 나는 한국 교회로부터 무엇인가 잘못 배우고 자라왔다는 일종의 배반감 같은 것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헌금은 더욱 많이 걷어 적립하고 더욱 큰 교회를 짓기 위해 더 큰 땅을 매입하는 것도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었다.

나는 1987년 첫 주일에 무작정 다니던 교회를 나왔다. 10시에 미8군 교회를 마치면 매주 발길 닫는 대로 아무 교회나 들어가 예배를 드렸다. 거대 교회로부터 작은 교회까지 교파를 불문하고 들어가 예배를 드렸지만 허전한 마음을 채울 수는 없었다. 모두다 비슷해 보였다. 그렇게 1년을 방황하였다. 드디어 12 27일 마지막 주일을 맞았다. 영영 뿌리 없는 떠돌이 교인이 될 것 만 같아 두려웠다. 이젠 갈 데도 마땅히 없어서 노신복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한광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 잠시 사택에서 차 한잔을 나누며 노목사님께 고민을 말씀 드렸지만 노목사님인들 별 해결책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 밤에 갑자기 노목사님 부부가 우리 집엘 오셨다 . “아무래도 집사님 성향에 맞는 교회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딱 한군데만 더 가보시겠습니까?” 하시면서 지적하신 곳이 구로구청 사거리 3층에 있는 작은 교회 라는 것이었다. 까짓 1년도 돌아다녔는데 한군데 더 못가 보랴 싶었다.

1988 1 3, 새해 첫 주일이 되었다. 8군 교회가 끝난 후 노목사님이 가르쳐 주신 곳으로 찾아 가니 과연 그 건물과 교회가 있었다. 화장실 냄새를 맡으며 올라가 3층의 교회 문을 여니 자그마한 공간에서 마침 예배가 시작되기 직전 이었다. 30명이 될까 말까한 교회의 맨 뒷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그곳이 바로 갈릴리 교회였다. 그러나 그 작은 공간에서 드린 1시간의 예배를 통해 나의 마음은 깨어 졌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며 가슴이 벅찼다. 내가 찾던 곳이 바로 여기구나 싶었다.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와 아내에게 말하였다. “여보 나 교회 정했소”. 그리고 그 다음주에는 아내와 같이 가서 등록하고 갈릴리 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막상 교회생활은 그렇게 녹녹한건 아니었다. 하루는 윤모 집사님의 출판 기념회를 한다 하여 광화문에 갔다. 갑자기 모두가 주먹을 내지르며사랑도 명예도 ……” 하며 운동가를 부르는 것 이였다. 난 혹시 경찰이 오는 건 아닌가 하고 보통 신경이 쓰이고 어색 한 게 아니었다. 예배시간에 성가대라고 몇 명이 앞에 서서 아침이슬’, ’솔아 푸르른 솔아등을 부르곤 하였으니 그 충격은 참 말할 수 없었다. 인생이 통째로 바뀌는 것 같았다.  그 마음을 잡아준 것은 물론 인 목사님의 주일 설교와 6개월 간에 걸친 구약 성경 공부였다.

출애굽기를 중심으로 한 그 성경 공부는 그야 말로 내게는 광야에서 만난 샘물과 같은 것이었다. 신앙의 목마른 지적 갈증을 적셔주고도 남는 것이었다.  또한 생전 처음 접하는 충격적 신앙 문화에 적응 하도록 결정적 도움을 준 것은 교인과의 인간 관계였다. 그 중 특히 고봉은 집사 , 정철수 집사, 우리 집 3가정은 매주일 오후 돌아가며 방문 하여 먹고 마시고 교제를 나누었다. 그 모임이 갈릴리 생활에서의 기반이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여름이면 전 교인이 수련회를 갔다. 청포대, 적목리, 영월 갈릴리 동산등 완전한 공동체 생활이었다. 한번은 청포대에서 저녁 레크레이션 시간에 우리 가족이 넷 이서 알파벳 송을 화음으로 불렀다가 졸지에 친미분자로 몰려 곤욕을 치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거치른 갈릴리, 그곳으로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 이었다고 생각한다. 그토록 간절히 찾던 곳, “일어나 그 갈릴리로 가거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극히 보수적인 개인 구원의 신앙과 외국인 회사에서 평화롭게 생활하던 내게 주신 한국교회에 대한 크나큰 명제요 질문이며 삶을 뒤흔든 의식이 갈릴리라는 이름이었다. 그 후 24년째가 되었다. 물론 나는 지금도 보수의식이 많은 사람이지만 그 동안 갈릴리 신학과의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며 구로 6동 교회를 거쳐 지금의 교회로 옮겨 오며 살아왔다. 어디나 그렇듯이 성향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같이 모인 공동체인 만큼 나 자신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의식과 형태 등 여러 가지 고비도 많았다. 그러나 어려울 때는 부모님에게 어린 시절부터 배운 가르침을 기억하고 초기에 가슴에 울리던 주님의 인도처럼 일어나 갈릴리로 가거라하신 말씀을 또 생각하며 발걸음을 교회로 향하였다. 세상을 향해 열린 문을 이곳에서 찾았었고 천국으로 향하는 야곱의 사다리를 이곳에서 보았었다.

교회 설립 25주년, 끓임 없이 변화하는 국가와 사회와 신앙의 토양에서 초기의 갈릴리 모습도 많이 변화하였다. 설립 초기의 교인들은 당회와 장로, 안수 집사 등 조직교회를 원하지도 않았다. 교인은 최대 200명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큰 교회 건물을 짓는 것은 잘못된 한국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조그마한 교회라도 짓게 된다면 다른 교회와 공유하여 예배 처소로 사용하고, 지역사회와 같이 나누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목사님은 말씀을 담당하고 교회의 모든 운영 방향은 평신도 전체의 모임인 정책위원회에서 정하여 평신도 중심으로 운영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고 그렇게 실천 하였다. 예배의 형태를 혁신하고 헌금의 50 퍼센트를 선교에 사용한다는 원칙을 철저히 고수 하였다. 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을 좋은 환경에서 가르치자 하였다. 사회와 정치의 잘못된 부분에 대하여 철저히 관심을 갖고 소외된 자들과 나그네된 자들에게 우리의 모든 관심을 기울였다. 그것이 신앙의 열정과 한국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실험 정신으로 뭉쳤고 순수한 기개로 뜨거웠던 갈릴리 초기 교인들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어느덧 4반세기가 한 순간에 흘러 버렸다. 그리고 그 초기의 모습들과 생각들을 지금 그대로 찾아 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우선 그 당시의 교인 구성은 지역사회에서 오신 분들이 거의 전무했다. 교회는 구로동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모두 다른 지역에서 주일이면 모여 들었다. 지금은 반대로 지역사회에 거주하는 분들이 대부분 구성하고 있으니 우선 달라 질 수 밖에 없다. 다만 그동안 나 자신이 부족했었다고 느끼는 점은 겸손이다. 그간 어떤 형태로든 상처를 받고 못나오는 분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권유하지 못하였다. 인간은 부족하니 실족할 수 있는데 그때에 교회가 어떻게 따뜻하게 잡아 주었나 하는 점이 가장 가슴에 걸리는 점이다. 강팍한 사회에서 상처받고 위로와 평화를 갈구하는 성도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주지 못한다면 변화의 시대에 갈릴리의 미래도 적응하기 어렵다는 것을 오늘 가슴에 깊이 새겨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