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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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교회에 등록한지 올해로 25 년차다. 흔히 4 반세기 라고 하는 25년을

나의 신앙생활의 절반을 갈릴리교회 에서 보냈다. 내가 처음 교회에 왔을 때엔

전좌석 200명인 작은 공간에서의 신앙생활은 전교인이 몇 가지씩의 일 들을 감당하면서

공동체적인 생활로 푸념도 하며 격려도 하며 나름대로 어떤 사명감으로 똘똘 뭉쳤었다.

신도림 시대가 열리면서 우리 교회는 일대 전환기를 맞이했다.

지역 특성상 APT 주민들이 대거 합류하여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분들이 있어

교회예산은 자연스레 늘어났고 소망교회의 지원부담에서 조금씩 벗어 날수 있었다.

28년의 교회 변천사를 겪으면서 우리는 또 한번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나의 고집스런 성수주일로 인목사님을 주일에 못 뵈온적이 거의 없었다.

해외 외유중일 때, 길어야 1,2 주를 빼곤 거의 비운적이 없으셨으니까,

송구영신 예배를 끝으로 2014년 1월 한달동안 뵌적이 한번도 없다.

그간의 상황을 알고, 듣고 했지만 구체적 인것은 잘 모른다.

80평생 처음 겪는 일이라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할 뿐이다.

이미 예정되어 있었고 신 구 세대를 교체하듯 구시대를 벗어나 우리는 이미 새로운

신앙세계로 진입하였고 큰 희망과 기대에 한껏 마음 부풀어 있다.

권사 은퇴 하기 전 까지의 교회사를 회상해 보며 길지 않은 여생에 대해 깊이 고민하면서

또 한해를 시작한다.

28년 전인 1986년 4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목사님께서 당신의
생일날, 목동 당신집에서 대여섯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린것이
갈릴리 교회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두어달 후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는 갈릴리 호수를 상징하듯

교회 명칭을 갈릴리라 정하고 구로구청 앞 3층 건물에
월세를 얻어 화장실 냄새와 함께 먹고 마시며 간절한 예배를
드렸읍니다. 이듬해 목사님께서 목회학 박사 (샌프란 시스코 대학)
학위를 취득하시고 주보도 만들며 청포대 해수욕장으로 전교인
수련회도 다녀 오며 교회의 틀을 조금씩 잡아 가기 시작했읍니다.

89년 예배 처소를 희망의 집( 소망교회 20주년 기념 사업)으로
옮기고 맞벌이 부부를 위한 희망 어린이 집을 개원하여 돌보아줄 사람 없는 어린아이들을

보살피며 노동자들의 삶에 작은 힘을 보태 주었고 부설 노동 상담소, 공해문제 연구소

(초기에 매일 발간되는 각 신문에 게재된 환경에 관한 기사들을 모아 스크랩 하는 일을 도왔음)등

건물을 함께 나눠 쓰며 전교조 모임 장소로 허용하여 늘 북적거리며 시대의
아픔들을 공유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기를 기원했읍니다.

이듬해인 1990년은 나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해이기도 했읍니다.

하나뿐인 아들의 결혼식을 주일날 본당에서 예배후 거행한 사건이였읍니다.

만우절인 4월1일 거짓말처럼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이 치뤄졌고 전 교인이

교회 식당에서 피로연을 겸한 식사를 함께 하였던 사건 아닌 사건이였읍니다.

서울생활이 서툴었던 나는 음식들을 춘천에서 만들어 새벽차로 공수해 왔읍니다.

예배시에 쓸 화환까지 춘천에서 주문했는데 차가 늦게 도착하여 우왕 좌왕하던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파격이 아닐가 생각됩니다.

92년 200석 교회 본당의 자리가 반쯤 채워질만큼 이런모양
저런모양으로 정의를 부르짖던 이들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이들이 꾸역 꾸역 모여들어 서로의 아픔을 달래기도 했읍니다
갈릴리 공동체 계약예배를 드리며 구체적으로 실생활과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노력에 박차를 더해 가며
이 무렵 이방 나그네인 이주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가저 그들을 위한 첫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읍니다.

다음해 본격적으로 주일 오후에 이주 노동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고 시작은 미약했지만

누구보다 앞서서 이 일을 시작한 우리 목사님은 역시 선견지명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만남의 장소로 정하고 전국에서 모여든 이주노동자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치료도 해주며 열심히 간식도 제공했읍니다.
부목사님께선 밀린 임금을 받아 주기 위해 동분서주 하셨고
닭을 튀기느라 비지땀을 흘리며 나름대로 정성을 다했지만
빠듯한 예산에 50%를 사회선교에 쓰겠다는 원칙에 때로는 눈물을 머금기도 했읍니다.

오죽했으면 담당 권사님을 튀기라는 목사님의 말씀에 체구가 크신 목사님을 튀기는것이

훨씬 낳겠다는 서글픈 이야기가 나왔을까요
어떠한 어려움과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절반의 원칙을 고수하며 괄목할만한 큰 일을 해내기도 했읍니다.
교회 앞에 쓰러저 사경을 헤메던 필립핀 여성을 치료하여 본국으로 돌려 보냈던일,

인천 (동양목재) 에서의 두 동강난 시신을 산재 처리하여 섭섭지 않은 보상을 받아

고향으로 송환했던 일 등 이주 노동자들의 아픔을 달래 주기에 최선을 다했읍니다

매월 마지막 주일은 환경 보존의 날로 정하여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노력과 바른 먹거리를 먹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예장 생협( 예수교 장로회 생활 협동 조합)에

전 교인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출자금을 내며 생협운동에 앞장서기도 했읍니다.
넘어 가지 않는 우리밀 국수를 약 먹듯이 먹으라는 목사님의 엄명에 불평도 못하고

억지로 먹으면서 대체할 음식을 찾아 고민하며 예배의 연장으로 친교를 나누기에 힘썼읍니다
그해 여름 전교인 수련회를 영월군 수주면 엄둔 분교에서 화려하게 가젔으며 피서지로

더할나위 없이 좋았던 시원하고 맑은 계곡의 물이 일품인 청정지역이 이제는
옛 일이 되어 아쉽기만 합니다.

처음으로 안수집사 일곱분과 권사 세 사람의 취임도 있었읍니다.

96년에 인명진 목사님을 위임 목사님으로 추대하고 유아세례시
친 부모가 아닌 신앙 보증자 예배도 드리며 다음해 종려주일에
93명이 시신및 장기기증 서약을 한 뜻 깊은 예배도 드렸읍니다.

98년 인목사님께서 <국민훈장 모란장> 서훈을 받으시는 영예를 함께 누리며

그 누구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항존직 시무 투표 규정을 통과 시키는 역사적인 일도 해냈읍니다.
아울러 기독교 인터넷 방송국 개국과 함께 조선족 교회가 창립하며

몽골족을 따로 분리해 예배를 드리기도 했읍니다.
2000년에 들어 서면서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필립핀이 독자적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며

여러 국적을 가진 사람들로 주일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북새통을 이루곤 했읍니다.

구로동을 떠나 신도림 시대를 개막하며 교회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읍니다.

구교인 신교인 이란 신조어를 남기며 어쩌면 융화되기 어려운 어색함마저 감돌았던 때도 잠시 있었읍니다.
아파트 단지의 특성상 가깝다는 이유로 초신자가 아닌 교회의 핵심적인 사람들이 늘어 나면서

급성장하기 시작했고 예산도 함께 늘어 이제 독자적으로 설수 있게 되었읍니다.
사람도 스므살이 되면 성인으로서 무엇이든 독립적으로 결정 할수 있다는데 스므살이 된 우리교회도

이제 소망교회의 지원을 받지 않아도 될만큼 성장의 기반이 잡히지 않았을까요.
5년동안 각 나라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무성하게 자라 세례받는 인구가 늘고 말씀을 선포할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8명이 될만큼 결실을 맺게 되었으니 우리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크신 축복에 감사하지 않을수 없읍니다.
20년이 아니라 200년 아니 영원 무궁하기를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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