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 요하난(Yohannan)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풍요를 잘 모를 뿐만 아니라, 때때로 그것을 마치 경멸하는 것처럼 보인다. 휴게실 의자를 찾으면서 나는 그들이 자신의 예쁜 옷과 구두를 어떻게 취급하는지 놀라움으로 쳐다보았다. 훌륭한 옷감과 색조는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보다 훨씬 뛰어났다. 거듭해서 발견한 사실은 이 나라가 그들의 엄청난 부를 타성적으로 당연시 한다는 것이다.
그 후 얼마 동안 나는 거의 매일같이 불과 몇 주 전에 떠나온 자국인 선교사들의 옷과 미국인들의 옷을 비교하였다. 수많은 자국인 선교사들은 맨발로 마을을 다니거나 다 해어진 덧신을 신고 일을 한다. 그들의 닳아빠진 옷은 미국에서는 걸레로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미국인 중 대부분의 옷장이 이따금씩만 입는 옷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수년 간 몇 벌의 옷만 등에 걸치고 여행하며 사역했던 시절을 기억해 보았다. 나도 대부분의 자국인 선교사들과 마찬가지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경제학자 로버트 헤일브로너(Robert Heilbroner)는 미국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이 만일 2/3세계의 10억이 넘는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산다고 했을 때 포기해야만 하는 사치 품목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먼저 어느 미국인 가정에 들어가 그 가구를 빼앗는다고 가정하다. 침대, 의자. 탁자, TV, 전등, 그 모든 것을 빼앗는다. 낡은 담요와 식탁과 나무의자는 남겨 놓는다. 장롱과 함께 옷도 뺏는다. 식구들마다 각각 자기의 오래된 정장 한 벌과, 셔츠나 블라우스 한 벌만 가질 수 있다. 그 집의 장을 위해서는 한 켤레의 신발을 허용하지만 부인이나 자녀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제 부엌으로 가보자. 이미 부엌의 모든 주방 기구가 없어졌으므로 찬장 속을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성냥 한 통과 작은 밀가루 한 포대, 약간의 설탕과 소금이 있다. 이미 쓰레기통에 던져진 곰팡이 낀 감자는 오늘 저녁 끼니를 위해 남겨 놓아야 한다. 또 양파 몇 개와 마른 콩 한 접시도 남겨 놓을 것이다. 고기, 신선한 야채, 통조림, 과자, 사탕 등 나머지는 모두 가져 간다.
이제 우리는 그 집을 말끔히 비웠다. 목욕탕이 제거되었고, 수돗물도 끊겼으며, 전기도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다. 다음으로 할 일은 집을 아예 없애 버리는 것이다. 식구들은 헛간으로 갈 수밖에 없다……. 외부와 연락을 취할 방법도 없애야 한다. 더 이상 신문이나 잡지나 책도 모두 없애 문맹률을 높게 해야 하기 때문에 어차피 그런 것은 필요도 없다. 그 대신 우리의 빈민굴에 오직 라디오 한 대만은 허용할 것이다…….
이제는 정부의 공공 혜택을 끊어야 한다. 우체부도, 소방대원도 없다. 학교가 있기는 하지만 3마일(5km)이나 떨어져 있으며 교실도 두 개밖에 없다……. 물론 근처에는 병원이나 의사도 없다. 가장 가까운 진료소도 10마일(16km)이나 떨어져 있고 그것도 오직 한 명의 산파가 운영하고 있다. 자전거가 있는 사람만 이 진료소에 갈 수 있는데 그나마 자전거를 가진 집도 거의 없다…….
마지막은 돈이다. 우리는 이 가정에 5불 가량의 현금만 허용할 것이다. 그 돈이면 이란의 한 농부가 입원비로 착각한 단돈 4천원이 없어, 치료받을 수 있었는데도 시력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비국을 이 가정이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상은 내가 살아온 곳의 생활에 대한 정확한 묘사이다. 미국 땅을 밟는 그 순간부터 나는 믿기 힘든 현란함 속에서 지내 왔다. 이처럼 상이한 두 개의 생활 모습이 어떻게 지구상에 동시에 공존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내게 압도적이며 혼란스러웠다. 공중전화를 사용하거나 잔돈을 거스르는 등의 매우 간단한 일들조차 배워야 했을 뿐만 아니라, 민감한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보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언제나 영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몇 주의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대부분의 서양 성도들의 영적인 가치관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를 놀라움 속에 깨닫기 시작했다. 슬프게도 그들은 세속 문화를 지배하는 인본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에 대부분 심취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미국에 다가오고 있는 두려운 심판을 즉각적으로 감지하였고 하나님이 이러한 풍요를 그들에게 영원토록 베푸시지 않을 것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경고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메시지가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았고 그러한 죄에 대항해서 말할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을 덧입으려면 몇 년이 더 걸릴 것 같았다.
한편으로 나는 미국을 여러 면에서 축소해 놓은 텍사스에서 가장 흔한 일들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 나를 접대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나에게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그들이 거대한 교회 건물이나 고층빌딩과 대학교들을 보여 줄 때 나는 예의상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나는 별로 큰 인상을 받지 못했다. 나는 일찍이 암릿사르(Amritsar)의 황금신전, 타지마할(Taj Mahai), 잔시(Jhansi)의 궁궐들, 구자라트(Gujarat)의 바로다(Baroda) 대학 등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정작 제 2/3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미국인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단순한 것들이다: 하루 스물네 시간 사용할 수 있는 깨끗한 물, 무제한의 전력, 전화, 전국을 뒤덮는 포장된 도로망 등, 인도에서는 물, 전기, 전화, 대중교통이 산만하게 운영된다. 전화하는 것이 악몽이다. 장거리 전화를 걸려면 며칠씩 기다려야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인도에는 TV가 없었지만, 내가 접대한 미국인 집에는 마치 방마다 TV가 있는 듯했고 밤낮으로 방영하고 있었다. 대중 매체의 끊임없는 소음은 나를 괴롭혔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미국인들은 항상 주변을 소음으로 채워야 하는 사람들 같았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데 차내에 라이오가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
“왜 그들은 언제나 즐기거나, 남을 즐겁게 하려고만 할까?” 나는 궁금했다. 그것은 마치 아직 규명하지 못했거나, 심지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어떤 죄책감에서 도피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느끼기에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항상 등치가 커 보였다. 미국인들은 몸집이 크기 때문에 큰 차와 큰 집과 큰 가구를 필요로 한다. 먹고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약물을 사용하는 것이 서양인들의 생활 가운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심지어 성도들의 모임에서도 음식이 교제 활동의 중요한 일부였다. 물론 먹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신양성경의 교회 생활에서도 ‘애찬식’은 하나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먹는 것도 그 정도가 지나칠 수 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미국인들이 음식을 위해 지출하는 비용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사실이다. 1998년 조사된 미국인의 개인당 1년 평균 지출은 19,049불(약1천9백만 원)인데, 그 중에서 1,276불(약 128만 원)은 식비로, 나머지 17,773불(1천7백80만 원)은 다른 용도로 지출하였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개인당 평균 지출이 겨우 276불(약 28만 원)이며 그 중에서 음식비로 134불(13만4천 원, 전체의 48.4%), 그리고 나머지 다른 모든 용도에 고작 142불(14만2천 원)을 사용하였다. 나는 매일 이러한 현실 속에서 생활했지만 미국인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
내가 교회의 모임에서 현지 사역자들의 고충과 필요에 대하여 말하면 종종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보통 헌금을 거두어서 대단히 많은 액수로 여겨지는 수표로 내게 주곤 했다. 대체적으로 친절한 그들은 모임이 끝난 후에 교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나를 식사에 초대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음식과 ‘교제’에 사용된 돈은 그들이 방금 선교를 위해 드린 돈보다 더 많기가 일수였다. 그리고 나는 미국인 가정이 아시아의 한 가정이 일주일 동안 먹고도 남을 분량의 고기를 한 끼에 먹는 것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하지만 나 말고도 아무도 이것을 눈치 채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고, 그들이 내 설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음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그들은 해외의 엄청난 필요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요즘에도 나는 미국에서 여행하면서 음식을 자유롭게 주문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음식의 가격을 보면서 그 동일한 금액의 돈이 인도나 미얀마, 필리핀에서 얼마나 큰 돈일까를 생각하면 갑자기 식욕을 잃고 만다.
많은 자국인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은 먹을 음식도 없이 며칠을 지낼 때가 있다. 자원해서 금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쌀을 살 돈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특히 그리스도인이 아무도 없는 마을에서 새롭게 사역을 시작할 때 자주 겪는 일이다.
현지 사역자들이 당하는 비통한 어려움을 생각할 때 나는 가끔 내 앞에 놓은 후식을 먹을 수가 없다. 그런다고 굶주린 그들에게 음식ㅇ틀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만, 아시아의 사역자들은 굶주리고 있는데 나 혼자 먹는 즐거움을 누릴 수는 없었다. 이러한 필요는 현재 우리가 후원하고 있는 자국인 선교사 모세 파울로스 형제의 사역을 통해서 내게 더 실제적으로 다가왔다. 가난하고 무식한 수백만 명의 어부들이 아시아의 수천 개의 섬과 엄청나게 긴 해안가의 침체된 지역에 살고 있었다. 그들의 집은 보통 나뭇잎으로 만든 작은 오두막이며 그들은 즐거움이라고 거의 없는 고된 노동의 단순한 생활을 살고 있다. 이러한 어부들과 그 가족들은 세상에서 가장 복음화되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속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세 형제와 그의 가족을 부르셔서 인도 동해안에 위치한 타밀 나두(Tamil Nadu)의 어촌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그의 가정을 방문했을 때가 기억난다. 모세 형제가 그 마을을 방문하기 시작했을 대 발견한 첫 번째 사실은 그곳의 문맹률이 너무 높아서 전도지나 인쇄물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환등기를 사용하려 했지만, 영사기도 없었고 또 그것을 구입할 돈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필요한 돈을 마련할 때까지 여러 차례 병원을 다니며 자기의 피를 뽑아 팔았다.
그렇게 해서 구입한 환등기 때문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는 기뻐했다. 스크린으로 사용할 흰 천을 걸어 놓기만 하면 수천 명의 어른과 아이들이 해변을 따라 모여들었다. 파울로스의 아내는 자동차 배터리로 작동하는 확성기를 사용해 복음성가를 불렀으며, 다섯 살 난 아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성경구절을 암송하였다.
해가 떨어지면 파울로스 형제는 환등기를 보여 주며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를 등지고 모래 위에 앉아서 몇 시간 동안 복음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다. 마침내 떠나고자 짐을 꾸릴 때는 모래 위에 잠든 수백 명의 아이들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걸어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 배후에는 파울로스와 그의 가족이 남몰래 굶고 있었다는 슬픈 사연이 있었다. 한번은 그의 아내가 배고파 우는 아이들의 허기진 고통을 억누르려고 물병에 있는 물이라도 먹이려고 아기들을 달래는 소리를 들었다. 집에는 우유를 살만한 돈조차 없었다. 음식이 없다는 사실을 이웃의 불신자들이 알게 될까봐 파울로스는 단칸방 셋집의 창문과 방문을 걸어 잠그고는 굶주린 네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그들이 듣지 못하도록 했다.
한 번은 영양실조에 걸린 한 아이가 굶주린 나머지 기운을 잃고 수업시간에 잠이 들어버린 적도 있었다. “나는 선생님이나 이웃들에게 말하기가 부끄러웠어요. 오직 하나님과 우리 자녀와 내 아내와 나만 참된 내막을 알고 있지요. 하지만 아무런 불평도 불행도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일에 전적으로 만족하고 있지요.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수 있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할 뿐이예요.”라고 그는 말했다. 심지어 선생님이 자기 자녀들을 집중력이 없다는 이유로 꾸중해도 파울로스는 남모르는 고통을 이야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지 않았다. 다행이 이때는 관대한 미국 성도들의 도움으로 즉시 그를 도와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경우 상황이 이처럼 다행스럽게 끝나지는 않는다.
파울로스 형제와 같은 사람들이 굶고 지내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잘못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파울로스 형제의 필요뿐만 아니라, 제 2/3세계의 모든 필요들을 채우기에 충분한 물질을 이미 주셨다. 그 물질은 서구 선진국들 가운데 있다. 북미의 성도들만으로도 큰 희생 없이 제 2/3세계 교회들의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다.
달라스에 있는 한 친구는 최근에 7,400만 불(740억 원)을 들여서 지은 교회 건물이 달라스에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 엄청난 액수를 생각하고 있을 때, 그 친구는 그 교회에서 1분 거리 이내에 700만 불(70억 원)짜리 또 다른 교회 건물이 솟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호화로운 교회 건물은 제 2/3세계의 시각에서 볼 때 정신 나간 행동일 뿐이다. 미국에서 건물 하나에 사용된 7,400만 불의 돈이면 인도에서는 보통 크기의 교회를 7천 개 이상 지울 수 있다(인도에서 평균 크기의 교회를 지으려면 약1만불(1천 만원) 정도 소요된다-역자 주). 7,400만 불의 돈은 인도의 한 주 전체나 아시아의 몇몇 작은 나라들을 복음화하는 데 충분한 액수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주제에 대해서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한 명의 손님에 불과했다. 그런 건물들을 지은 미국인들이 내가 다녔던 한교회도 지었으며 나의 수업료도 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건물들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예배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하였다.
아시아에서는 지금도 예수께서 집 없이 방황하고 계신다. 그분은 머리 둘 곳을 찾고 계신데 그곳은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이다. 새롭게 거듭난 성도들은 건물을 지을 능력이 있을 때까지 주로 자기들 집에서 모인다. 비기독교 지역에서는 교회 용도로 건물을 빌리는 것이 때때로 불가능하다. 미국에서는 교회 건물들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게 높은 나머지 교회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아니라 바로 모이는 사람들 그 자체라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고 만다.
그러나 교회의 건축 계획과 맞서 싸우라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은 아니다. 교회의 낭비보다 더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이러한 노력들이 속된 사고방식을 보여 준다는 사실이다. 왜 우리는 헌금의 10%만이라도 세계 복음화를 위해 드리지 못하는 것일까? 2000년에 미국의 성도들만이라도 그렇게 결단하고 헌신했다면 무려 100억 불(10조억 원)을 복음 전도를 위해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만약 이 금액으로 자국인 선교사를 지원했다면, 우리는 큰 도시의 인구만큼 많은 선교사들의 병력을 선교지에 파송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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