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무어 선교사의 흔적을 만나러가는
3월 첫날은
엊그제 펑펑 쏟아진 눈으로 잔설이 곳곳에 남아, 겨울의끝자락을 아쉬워 하고 있다.
승동교회
오늘은 3.1 절!
3.1운동당시 전국의 대학생들이 모여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나누어주고 만세 운동을 하였다는
그 장소, 그 교회는 입을 딱 봉한채 아무 말이 없다.
마치 역사와 상관 없는 교회인듯...승동교회문은 굳게 닫혀 있고, 봄은 알리려는 바람만 거세게 불며,
우리의 아쉬운 마음을 위로 하고 있다.
1892년 32살의 사무엘 무어 선교사는 조선땅을 밟고, 곤당골 교회(소공동 롯데 호텔 자리)를 세우곤,
이땅에 고통받고있는 천민들과 버려진 고아들을 구제하며,
교육(평양 신학교, 경신학교 출강)자로서, 백정과 여성 해방을 위한 민주주의 자로서,
신문사를 운영(그리스도 회보) 하는 언론인으로서의 많은 일들을 감당하기에 이르른다.
백정과 같이 예배 드릴수 없다며, 좌석을 별도로 요구하는 양반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장티푸스에 걸려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백정 박성춘은 무어의 동료의료 선교사인 에이비슨
(제중원 4대원장, 세브란스 의대 설립)의 치료를 통하여,
후에 장로가 되기에 이르르고, 그의 아들 봉출은 당시 신분사회의 어려움에도,
세브란스의대에 들어가 우리나라 서양의사 1호가 된다.
백정들과 같이 예배드릴수가 없다고 따로 홍문동교회를 설립하여 나갔던 양반들이 회개하며 곤당골교회와
합하여 1898년 중앙교회를 설립하였는데 그 교회가 지금의 승동 교회라 한다.
이렇게 역사가 있는 교회이건만, 우린 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바람을 피하여 교회벽에 서서, 우리를 위하여 열심히 설명 해주시는 목사님에게 미안함만이 가득 하였다.
열정적으로 설명하시는 목사님의 머리위로 따듯한 햇빛이 내리쬐이길 기대 하면서...
마포는 전국의 곡물이 올라오는 통로였다한다.
마포나루! 아직도 우리귀에 익숙한 단어이다.
임금에게 올리는 물자는남대문을 통하여 들어가고, 백성들의 물자는 아현동을 통하여 들어갔으며,
도자기를 구울때 가마를 덮는 것도 달랐다 하니, 금수저 얘기는 그때의 얘기가 아닐까?
마포에서 꽤나 이름이 알려진 설렁탕 집!
집에서 끓인듯 다시다 맛도없고, 프림을 탄 것처럼 뿌옇치 않아 마음놓고 배를 채운다.
모두가 추운몸에 따듯한 국물이 들어가니 행복한 모습이다.
여기에 더해, 목사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커피의 달콤함까지 지불 하셨으니....
동막교회
서민들이 독을 만들어서 팔던 지역 독막이 변하여 동막이 되었다는 그곳,
망나니들이 목을매던 서소문이 가까이 있고, 장례행렬이 지나가던 서대문이 가까이 있고,
유난히 순교자가 많았던곳도 서쪽 그곳!
미국 장로 교회에서 사무엘 무어의 업적을 기리는 추모기념예배당으로 지정 되었다는 동막교회가
그곳에 우뚝 서 있다..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로 수십개의 집회장소와 교회가 무어 선교사를 통하여 개척되어지고,
무어 선교사의 조수격이었던 천광실 조사가 첫 조선인 목회자가 되기도 하였던곳이며,
대현교회와 용산교회를 (98-99년)를 세운 동막교회는 그러나,
1906년 무어 선교사는 장티푸스에 걸려 46세의 나이로 동막교회에서 소천 하셨으니,
그 애통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양화진
어느덧 오후의 햇살이 멀리 보이는 강물위로 반짝반짝 빛나는 언덕위로,
외롭고도 힘든 선교사와 그의 가족들과, 뜻을 함께 했던 많은 이들이
십자가를 가슴에 안고, 안식 하고 있었다.
고요와 평화를 말 할 수 있을까?
선교와 사명을 논 할 수 있을까?
주님을 믿었다는 60여년의 세월의 부족함이 가슴깊이 밀려 왔다.
나보다 남을 더 사랑 하라는데...
나보다 ....모두가 나보다 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