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추억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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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2.24이면 만60세가 되어 직장에서 정년퇴임하게 된다. 정년을 앞둔 시점에 잠시 달려가던 인생의 길을 멈춰 지난 질곡의 삶을 돌이켜보는 여유를 갖어본다.


나의 행복한 순간은 과연 언제였을까? 대학교 입학하여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던 때?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육군 장교(ROTC)로 임관하던 날? 사랑하는 이와 연애할 때? 결혼식장에서 예쁜 신부를 기다리는 순간? 신혼생활 시절? 큰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아버지가 되던 날? 대기업에 취직하여 첫 출근하던 때? 큰 딸이 시집가던 날? 손자 제민이를 보던 날? 물론 당시 순간에는 무척 기쁘고 즐거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모두가 아닌 듯 싶다. 이런 저런 생각중에 내 행복한 시절은 삶이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날들이였음을 이제사 깨닫는다.


5남매의 둘째로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서 태어난 나는 천덕꾸러기로 온갖 설음을 받고 자란 듯하다. 왜정시대 고향인 함경남도 영흥에서 왜경에 쫓겨 만주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어 홀연단신 월남하여 군인이 되셨던 아버님은 이남에서 처음 얻은 형은 장손이라하여 총애하고, 큰 여동생은 큰딸이라 예뻐하고, 막내 남동생은 막내라고 귀여움을 독차지 한다. 둘째로 태어난 나는 옷과 신발, 책가방과 책 등 모든 것은 형의 것을 물려받고 마치 머슴처럼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 했으며, 어머니나 형이 부르면 얼른 네! 하면서 달려가야만 했다. 지금은 미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둘째 여동생 김명옥도 나와 같은 처지였던 것같다. 훗날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지만 형을 낳은 후 몸이 무척 좋지 않던 중, 뜻밖에 임신된 나를 유산시키려고 애썼는데 운명때문인지 결국 태어나게 된 거라고 말씀 하신다.


당시 난방 및 취사에 쓰였던 연탄 가는 일과 냉장고가 없는 시절이였기에 아침마다 동네방네 종소리 울리는 장사꾼에게 쫓아가 콩나물 및 두부를 사는 일, 양파와 마늘, 시금치, 덴부라, 돼지고기 등 찬거리를 사러 가게로 심부름 가는 일, 그리고 빗자루질, 걸레질, 빨래줄에서 빨래 걷어와 개키는 것은 의당 나의 몫이였다. 시장보러 갈 땐 내 몸과 같은 크기의 특전사 배낭을 들러메고 어머니 뒤를 쫓아가서 한짐 가득 무거운 찬거리를 끙끙대며 지고 와야 했다. 당시 어느 집이고 주워온 자식이 하나씩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난 내가 주워온 놈인가보다 속으로만 생각하며 반항도 못하고 하루 하루를 살았다.


중학교 1학년때인가? 한번은 집에서 큰 여동생과 의견대립으로 싸우던 중 여동생이 울음을 터뜨렸는데 마침 들어오시던 아버님은 자치지종을 묻지 않으시고 동생을 울렸다는 것만으로 나만 일방적으로 혼내시는 순간 너무 억울한 마음에 그동안 쌓였던 울분이 폭발하고 말았다. 내가 주워온 자식이라서 나만 미워하시는 것 같은데 이젠 집을 나가겠다고 말하고 뛰쳐 나오다 붙잡혀서 빰싸다귀를 맞았는 데 내 작은 왼쪽볼에 어른 손가락 4개 모양의 선명한 시퍼런 멍이 들어 한동안 학교에 갈 때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머리 숙이고 다닌 적도 있었다.


아무리 경제가 어렵더라도 형이 해달라는 것은 거의 다 해주었던 것 같았다. 한번은 형이 빵먹고 싶다 말할 때 당시 내가 곁에 함께 있어서 였는지 어머니가 너도 함께 가자 해서 들뜬 마음에 어머니와 형뒤에 거리를 두고 졸졸 쫓아갔지만 빵집에 들어선 순간 어머닌 내게 구석을 가르키며 가서 앉으라 하시곤 물 한잔과 곰보빵 (소보로) 달랑 한 개를 시켜주셨다. 형 탁자를 쳐다보니 하얀 접시에 빵이 무너질 정도로 그득 쌓여 있다. 앙꼬빵, 크림빵, 고로깨, 동그란 도너츠와 팥도너츠, 곰보빵 그리고 곁엔 하얀 우유잔이 놓여 있다. 형이 빵을 맛나게 먹는 모습을 힐끗 힐끗 훔쳐보며 난 곰보빵 쪼가리 하나씩 떼어 입에 넣어 씹지도 못하고 혀로 녹여 먹으며 형의 빵 먹는 속도를 맞췄다. 형이란 사람은 자기가 마치 왕이 된 듯 말 안듣는다 또는 빨리 대답 안한다고 툭하면 때려 코피 터뜨리기 일수였다. 생각만 하면 너무나 끔찍한 어린 시절이였지만 그래도 요즘은 어머니와 형제자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과 함께 했던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은 왜일까?


그 외 군대에서 고생하던 시절, 어린 아이들 양육할 때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며 기저귀 갈아주고 한밤중 컹컹 소리를 내며 병들어 괴로워하는 큰 애를 보며 당장 죽을 것 같은 생각에 들쳐업고 개인병원으로 뛰어가 문을 두드려 의사에게 진료받고 집에 돌아와 밤새 곁을 지키며 내가 대신 아퍼해줄 수 없음에 마음 아펐던 날, 큰 아이가 사춘기시절 속을 썩일 때,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만 했어도 괜찮었을텐데 고집피우며 밤새도록 집사람에게 몽둥이로 맞다 기절하는 순간 갑자기 목을 뒤로 젖히곤 눈이 뒤집혀 흰자위만 보이며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면서 큰소리로 주문외듯 주절거릴 땐 너무 무서워 아이를 부둥켜안고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제발 고등학교만 졸업시켜주세요. (미쳐서 사람구실 못해 평생 데리고 살 줄 알았음), 그리고 몇 년전 갑자기 경제적으로 심히 어려울 때, 밤늦게 귀가하여 신림동 반지하 월세방 거실 바닥에 앉아 신문지를 깔고 김치도 없이 냄비라면을 먹고 있는데 빚쟁이가 들이닥쳐 현관문에 한 발을 걸치고 온갖 욕설로 빚독촉할 때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컸다, 언제 그 많은 빚을 다 갚나? 끝이 보이지 않아 하루하루 희망없이 힘들어 하던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이 다 옛일이 된 지금 생각하니 힘들었을 때가 더욱 기억에 생생하다.


즐겁고 기쁠 때와 힘들고 슬픈 과거의 모든 삶이 내겐 하나같이 소중한 추억이고 그 추억을 회상하노라면 내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퍼지며 어느덧 행복감에 젖는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게 주신 모든 것(사물)이 하나님의 축복임을 이제사 깨닫게 되었습니다. 귀한 몸과 생명 주시고 주님의 창조물들과 함께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지낸 날들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시켜 마음에 담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