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개신교)를 위한 변명 (이름: 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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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한국'보다는 '좋은 한국'에 베팅하겠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서프라이즈를 알게 된 것은 저 개인에게 큰 사건이었습니다. 이곳을 통해서 저는 한국 사회에 대한 새로운 신뢰와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외국에 나와서 10여년을 살면서 점점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 민족이 엄청난 저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또한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세계사에 크게 기여하게 되는 때가 머지 않았다고 봅니다. 저는 그 가능성을 서프라이즈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말을 도저히 못 믿어하는 동료들이나 후배들을 많이 봅니다. 한국은 좁은 땅덩어리다, 우리 사회에는 부정 부패가 만연해 있다,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우린 안돼," 등등의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이곳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역사, 특히 해방 이후의 역사를 생각할 때 "나쁜 한국" 보다는 "좋은 한국"에 베팅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라고 봅니다.
베팅만 할 뿐 아니라 우리는 "좋은 한국"을 살려낼 것입니다. 지금은 수천, 수만 명이 영어 연수와 유학을 위해 해외에 나가 있지만, 멀지 않은 장래에 수십만의 한국 젊은이들이 중앙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동유럽과 남태평양으로 자원봉사를 하며 땀 흘릴 것을 기대합니다. 이것이 평화와 통일 이후 한국 청년 문화의 화두가 될 것입니다.

이같이 약간은 붕 뜬소리, "근거 없는" 생각이 종교의 한 특징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개신교의 목사로서 최근 서프라이즈에 들어오는 것이 약간은 조심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몇 가지 사건으로 인하여 개신교는 점점 더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몇몇 교계 "지도층" 인사들이 한나라당(혹은 전문 용어로 "수구꼴통")과 함께 손발을 맞춘 일은 좋은 이야기거리가 되었습니다. 비록 고정 필진들은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기하지 않았지만, 손님글들과 댓글의 내용들로 미루어 보건대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에 대하여 크게 우려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은 종교와 정치의 문제, 보다 구체적으로는 한국 정치에서 개신교의 역할에 관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합리적으로 토론하는 것입니다.
서프라이즈의 최대의 공헌은 노무현을 대통령 만드는데 기여한 것도 아니고, 개혁 세력의 나팔수가 된 것도 아니라, 정치를 밀실과 책상머리에서 끌어내어 합리적 대화의 영역으로 끌어드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코드가 맞았던 것도 바로 이 부분이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합리적인 보수 논객이 제대로 등장한다면 그 누구보다 서프라이저들이 환영하리라고 봅니다. 사실 일부 고정필진들은 이념적으로 상당히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나 모두들 "일상적 수준의 합리성"이라는 코드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독 이곳에서 간간이 드러나는 종교에 관한 대화는 반공 교과서, 혹은 심지어 마녀 사냥의 음습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서프라이즈가 이만큼 영향력을 가지게 된 이유 중에 하나는 서영석씨가 한국 정치에 관하여 정통한 소식통이면서, 현장감을 확실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정치인들을 만나보고, 국회 의사당과 정부 주요 부처들을 돌아다니면서 정책 결정 과정을 직접 목격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경험입니다. 그런 "특권"을 누리게 되면 그 특권의 세계에 빠져들기 쉬울 텐데, 서영석씨는 그런 특권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기로 결정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정치 현장에 대한 합리적이고 경험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종교에 대한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종교 내부의 사실 관계들이 밝히 드러나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 혹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본질상 "밀실"에 있습니다.
밀실에서의 초월적인 경험이 없으면 종교는 철학이나 도덕과 다를 것이 전혀 없습니다.
신이 내리면 무당이 됩니다. 불성을 보았으면 그는 이미 부처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받으면 2000년 전 서른 세 살의 나이로 처형된 팔레스타인 청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신앙은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선택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예수에 관한 소식을 들을 때, 예수를 믿기로 작정해 버립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내가 예수를 믿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목회자와 교인의 관계도 본질상 은밀한 것입니다. 의사와 환자 사이의 대화는 절대 비밀입니다. 로마 천주교에서 고해 성사를 밀실에서 하는 것이 좋은 예일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최근 김홍도 목사 사건과 같은 사건들이 교회에서는 드물지 않게 일어납니다. 물론 목사는 그런 문제에 빠져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예를 들면 젊은 여자 교인들을 만날 때 목회자는 자기 아내와 함께 만나거나 혹은 연세가 있고 지혜로운 여자 교인들(흔히 권사)과 함께 만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은 흔히 오해를 사거나, 혹은 자신이 그 문제에 실제로 빠져들게 됩니다. 돈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소박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교인들은 목회자를 아끼는 마음에서 아무 조건 없이 목회자들에게 봉투를 건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전통 문화와도 물론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에 따라서, 지역에 따라서 그 금액은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이런 돈들은 대부분 목회자의 손을 거저 거쳐가기만 할뿐입니다.
마치 권노갑씨가 정치 헌금을 받아서 개인 치부를 한 것이 아닌 것처럼(맞나요?), 목회자들도 그런 돈으로 교회 안팎의 어려운 사람들이나, 연초 교회 예산에 미처 잡히지 않은 각종 지출을 위해 사용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도 목회자들은 이런 돈들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2년 뒤에 목사 안수를 받을 때에 그 예배에서 어느 연로하신 목사님이 권면의 말씀을 하신 것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무슨 고상한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돈과 이성, 이 두 가지만 조심하시면 다 잘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이 두 가지 문제에 빠져들고 있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런 예들을 사용했지만, 사실은 목회자와 교인 사이에 오고 가는 깊은 대화들은 그 전체가 본질상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그 사람의 가장 고통스러운, 혹은 내면적인 문제들을 주제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렀지만 겉으로는 평온한 척 유지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가정들이 있습니다. 사기와 합법의 경계선을 오락가락 하면서 돈을 벌며 고민하고 있는 사업가들이 있습니다. 생계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공희준 편집장이 서프라이저들의 오프모임에 나가보고 의외로 생활 수준이 높은 분들임을 확인하고 놀랐다는 말을 한 글이 있었습니다.
사실 목회자들은 교인들의 생사의 문제, 죽고 사는 문제와 씨름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구상에 사람이 산 이래로 인생살이가 한번도 호락호락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먹고사니즘"의 문제이든, 인간 관계의 문제이건, 전쟁과 도덕과 양심의 문제이건, 사람들은 언제나 돌아서면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목사의 입장에서 보면 서프라이즈 역시 아직도 "고담준론"의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정치는 배부른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비아냥대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를 잘하는 것은 배부른 사람에게 주어진 엄중한 책임입니다. 제대로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책임을 엄중하게 물으실 것입니다. 서프라이저들도 정치적 대화를 똑바로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냥 지나가지 않으실 것입니다.
정치 영역에 대한 엄중한 심판의 선포, 이것은 기독교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특징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와 정치가 만나는 점이 있습니다. 자칭 타칭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기본 동기는 바로 이 고리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그 전체의 약 4분의 1, 혹은 크게 잡으면 아마도 절반 가량이 정치와 정치 지도자들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되는데 구약 성경 중에서 특히 예언서라고 불리는 책들이 그런 내용입니다. (동의하지 않을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만..) 성경의 예언서는 그 이름과는 달리 앞으로 일어날 일을 족집게처럼 집어주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현실을 철저하게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도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펴는 정치인들(왕과 귀족)과, 정치에 자진해서 이용당하는 어용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욕설에 가까운 비판이 이 예언서들의 내용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미래"는 하나님의 심판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미래를 말하기는 하지만 그 미래는 단순히 물리적인 미래, 물리적인 시간표가 아니라, 현실을 뒤엎어 버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참고로 성경의 한글 번역판 중에서 공동번역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고 늦봄 문익환 목사님이 이 이 공동번역 성경의 번역자 중에 한 분이셨습니다. 아마도 그래서인지 공동번역 성경으로 예언서들을 읽으면 3천년 전 팔레스타인의 가무잡잡한 예언자들의 카랑카랑한 소리가 우리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중·적용되는 듯 합니다. 안 읽어보신 분들은 꼭 일독을 권합니다.
특히 대문에 글을 올리고 싶은데 문장력이 딸린다는 분들, 예언서 50번, 아니 30번만 정독하고도 대문에 못 올라가면 제가 술을 사겠습니다(?). 물론 제가 있는 곳으로 오셔야겠지만...


그런데 왜, 도대체 왜 저 개신교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분들은 전혀 성서와는 "코드"가 안맞는 것일까요?

일단 기독교 신앙의 내적 요인부터 짚고 넘어 갑시다.
예언자들이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면서 "개혁"을 외쳤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성공적이지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활동하던 고대 이스라엘은 쫄딱 망하고, 바벨론(후세인에 따르면 이라크의 전신)에게 온갖 수모와 굴욕을 당한 후, 힘깨나 쓴다는 국민들은 전부 포로로 잡혀갔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그후 몇 백년이 지나서 예수가 탄생합니다.

예수는 "개혁"에 관하여 새로운 "로드맵"을 제시합니다.
아무리 "너그들, 쌍것이여" 라고 욕을 해대도 사람들은 변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어느새 하나의 권력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뭔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한나라, 구주류, 신주류...) 그리고 종교(이 시점에서는 구약 성경이 유대교로 정착된 단계입니다) 는 죄인을 대량생산함으로써 자체 유지가 가능한, 즉 죄인과의 공생 관계에 돌입합니다.

예수는 이 유착관계를 해체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은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대단히 불경스러운 선포를 합니다. 사실 구약 성경 및 유대교의 근저에 이러한 가르침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쉽게 잠재울 수가 없었습니다. 나아가서 예수는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느냐, 그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가르칩니다. 물론 예수 운동이 초기에 엄청난 대중적 선풍을 일으킨 이유 중에 하나는 예수 자신의 거침없으면서도 인자한, 매력적인 성품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여간 예수님의 이런 "종교 비판"은 기독교가 결정적으로 보수화되는데 한 요인을 제공합니다.
즉 예수는 본질적으로 "개인"을 문제 삼았다고 보고, 개인의 "영혼" 구원이 예수의 최종적 목표라고 하는 해석이 이후 기독교사에서 큰 흐름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것은 결코 틀린 해석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지는 전후 맥락을 놓침으로써, 기독교는 다시 구원되어야 할 개인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이 되고, 따라서 죄인과의 공생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것이 너무 심해지면 자정 활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자정 활동의 가장 극적인 사례가 16세기의 마르틴 루터 등의 종교 개혁입니다. 종교 개혁의 표어들 중에 하나가 바로 "만인 사제설," 즉 모든 믿는 사람들이 다 목사요, 신부요, 사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의 종교 권력의 해체와 같은 것입니다.

한국 교회사에서도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 처음 들어온 기독교는 천하고, 압박 당하는 민중들 사이에 퍼져 들어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예수의 가르침은 유교 사회 속에서 "죄인"일 수밖에 없었던 낮은 계급의 사람들과 여성들 사이에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사실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는 선교사들이 미처 국내에 들어오기도 전에 한국 사람들의 손으로 세워지는 놀라운 기록을 남깁니다.
초기 기독교는 북한, 특히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크게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구한말 개화파 혹은 민족주의 지도자들 중에는 하나의 진보적 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는 분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냉혹한 국제사회 속에서 혼란을 겪고 있던 한국이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정립해 가기 위해서는 기독교밖에 대안이 없다고들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3.1 운동의 경우에도 전국에 흩어진 교회 조직이 가동되었습니다.

일제하에서 한국 교회는 몇 가지 변화를 겪게 됩니다. 당시 외국 선교사들은 일제의 한국 침탈 과정에 대해 묵인하는 정책을 채택합니다. "영혼 구원"이라는 목표에 집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후 한국 기독교가 보수화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두 번째로 한국 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저는 장로교 목사라 장로교 중심으로 쓰고 있습니다. 장로교 외의 역사는 잘 몰라서요)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신사 참배를 하며 친일로 돌아서는 가운데 일부 소수는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투옥과 고문과 순교를 당합니다.
그리고 해방 후 38선이 그어지면서 북쪽의 교회는 공산당과 생사를 건 투쟁을 벌입니다. 결과는 수많은 인명 살상 및 교회의 남하입니다. 이 과정은 황석영의 "손님"이라는 소설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소설이 얼마나 역사에 가까운지는 개인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해방 이후에 한국 교회는 지나친 보수적 교리의 문제와, 신사 참배의 문제로 홍역을 치르게 됩니다.
장로교의 경우에는 해방 이전까지 단일 교단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해방 직후 소위 "출옥 성도"들, 즉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대가로 많은 고난을 당했던 분들이, 교단 내 "일제 잔재 청산"을 외치고 나섭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지 못함에 따라 그 분들은 별도의 장로교 교단을 형성하여 분리됩니다. 이것이 "고신"파로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유명한 문부식씨가 졸업한 고신대학이 소속된 교파입니다. 교리적으로 극보수이지만, 가끔은 그것이 급진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몇 년 후에는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 신학을 지지하는 분들이 모여서 또 다른 신학교를 개교하고 별도의 교단을 세웁니다. 이것이 "기독교장로회", 한신대학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교리적으로 보수주의를 견지하는 분들이 분리됩니다. "예수교 장로회 합동측", 총신대학입니다.
어정쩡하게 남은 분들이 소위 "예장 통합측," 장신대학입니다. 현재 장로교 내에서는 이 예장 통합측의 교세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우리 민족사의 모순과 굴절이 교회사 속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교회 안의 지나친 친미적 경향은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을 거슬러 친일로 연결됩니다.
또 교회내의 진보적 세력은 삼일운동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교회내의 극단적인 반공주의는 북에서 쫓겨나야 했던 노년층 교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물론 모든 흐름이 단선적인 것은 아닙니다. 서로 교차되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지요.
하여간 밖에서 보이는 교회의 이런 저런 "튀는" 모습들은 민족사의 굴절과 그것을 소화해내지 못하는 미숙한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서프라이즈와 조선일보의 대결이 교회 안에서는 이미 50년 이상 진행되어 왔으나 아직 정리되지 못했습니다.

이 소화되지 못한 내적 갈등 속에서 한국 교회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계속 내어 왔습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한국 교회의 대외적 목소리는 반독재 투쟁과 민중 운동, 그리고 통일 운동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그 유명한 영등포 도시산업 선교회라든지 문익환 목사님, 수많은 민중 교회의 활동 등은 민주화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시기에 교회는 가장 크게 성장했고, 가장 큰 혜택을 누린 집단이기도 했습니다.

하여간 김영삼-김대중을 거치면서 이 예언자들은 계속 활동했습니다.
특히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이면에는 북미주 한인 목사님들이 꾸준히 북한을 방문하여 신뢰를 쌓고, 내부 정보를 읽어낸 흥미로운 역사가 있습니다.
이분들은 미국의 주류 교단들을 통하여 진보적인 미국 정치인들, 궁극적으로는 클린턴의 정책 결정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객관화시키기에는 좀 그렇지만, 하여간 종교적 영향력이라는 것이 흔히 그렇지요. 너무 크게 바라지 마세요!^^)

그런데 노무현 정부에 이르러, 한국 사회가 본격적으로 "개혁" 되어가기 시작하면서, 또 다른 성향의 "예언자"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예언자들 역시 반정부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예언 활동의 근거는 앞에서 말한대로 성서 자체입니다. 성서는 끊임없이 예언자를 만들어냅니다. (성경은, 예언자가 안 나오면 돌들이 소리를 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현실인식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안주할 수 있었던 보수적인 개인 중심의 신학과, 친일친미적 세계관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실제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예언자"들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전통적인 개혁 성향의 "예언자"들은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에 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별로 크게 들리지 않는 시대가 된 것뿐입니다.
한완상 전 총리도 목사 안수만 받지 않았을 뿐, 옛날 전두환 정권 시절 미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하신 분입니다. 영등포산업선교회를 이끈분은 인명진목사입니다.. 수많은 개혁적 "예언자"들이 소리 높여 외치고 꿈꾸던 그 미래가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시대입니다.

길에서 외치는 이 예언자들 이외의 대다수 목회자들은 어떤 편일까요?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편향성을 교회에서 드러내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주제들, 즉 정치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통일과 환경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등은 늘 교회에서 이야기되는 주제들입니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인 사안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합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정파나 출신 지역 등이 다 섞여 있게 마련입니다. 교회 안에 개혁당 청년 당원들이 있고, 한나라당 장로와 집사들이 있고, 영호남과 충청도 출신들이 골고루 섞여 있습니다.
이분들은 교회에서 만나면 교회 안의 주제들로 이야기하기에도 바쁩니다. 주일학교 아이들 가르치는 일, 교인 운동회 하는 일, 그 자리에 없는 교인 흉보는 일(?) 등등으로 바쁘지요.
목사는 교회를 이끌어 가는 일, 즉 목회에만 전념할 뿐, 교회 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극히 조심하는 편이지요. 그리고 한나라당 장로를 만나면 한나라당 잘되라고 기도하고, 민주당 장로를 만나면 민주당 잘 되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쩌겠습니까, 별 수 없지요. 목사의 관심은 결국 그 교인이 하나님을 실존적으로 경험하느냐, 예수가 그 사람의 주인이냐 종이냐, 이런 것에 있습니다. 그 외의 것은 그 사람이 알아서 하도록 믿어 주는 것이지요. 가끔은 간섭하기도 하지만요. 정치 지도자나, 예언자들의 입장에서는 모든 목회자들이 자기 뜻대로 움직여 주면 좋겠지만 거의 90퍼센트 이상의 목회자들은 교인들의 정치적 선택에 영향력을 미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95퍼센트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싶네요.

그러나 이런 정치적 중립이 실상 수구와 보수로 작용하고 있는 현실은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70~80년대의 성장기를 거치면서 한국 교회는 점차 권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목회자의 권위가 지나치게 강조되고, 교인들에게는 순종과 협력이 최고의 미덕으로 가르쳐집니다. 또 교회의 교인에 대한 구속력도 매우 강조됩니다.
그런데 사회적 보수성이 흔들리게 되면 교회내의 이런 권력 관계에도 금이 갈 것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외피를 지켜서 교회의 기성 질서를 보호할 것인가, 아니면 개혁된 세상에 어울리는 새로운 교회의 모델을 만들어낼 것인가, 이것이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던져진 과제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교권주의로 갈 것인가, 아니면 만인제사장설에 충실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 교회의 개혁은 한국 사회의 개혁에 따라 수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너무나 개교회 중심으로 가있어 개혁을 주도할 수 있는 중심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들이 단결해서 한쪽을 밀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그런 우려하시는 분들이 흔히 있는데, 그런 일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엉성하고 거칠게나마 한국 교회의 전후좌우를 그려보았습니다.
교회, 특히 예언자들과 합리적인 대화는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김동렬씨인가, 전에 누군가의 글에서, 종교적 신념이 없이 개혁은 불가능하다, 반드시 변절로 이어진다고 읽었던 것 같습니다.
예언자들, 교인들은 성향에 상관없이 이 종교적 신념의 영역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합리적인 대화는 어렵겠지만, 한국 교회의 현상이 보다 합리적으로 파악된다면 그래도 비교적 발전적인 토론이 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