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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진이 살아온 내력

인명진은 194561일 충남당진에서 태어났다. 해방둥이이다.

격동하는 한국현대사가 그가 살아온 삶의 자리였다.

그는 아버지 인치희(장로)와 어머니 홍경희(권사)6남매 중 장남으로 증조모로부터 이어지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그래서 기독교신앙은 그의 온 삶에 이슬처럼 젖어있다.

대전고등학교 한국신학대학(B.A.) 장로회신학대학(M.Div)에서 공부했는데 그에게 가르침을 주셨던 김재준, 김정준, 서남동,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 이우정, 곽선희, 변조은 등 스승들을 그는 늘 자랑했으며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곤 한다. 그는 신학을 하면서 특히 구약을 좋아했고 그래서 그는 구약을 본문으로 설교하기를 좋아했으며 그의 구약 성경공부는 특별하기로 유명하다.

장신대 2학년인 1970년 전태일 사건이 일어났고 그 다음해인 졸업반 때 김진수 사건에 직접 관계하면서 우리사회의 노동문제의 심각성을 자각하게 되었고 신학교를 졸업하자 공장에 들어가 1년간 노동자로 살다 영등포산업선교에 들어가 1973년에서1984년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소위 1970년대의 여러 노동운동의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했다. 영등포산업선교의 사역은 변조은 목사와 호주연합교회가 전적으로 지원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의 사역 중 그는 1974(긴급조치1), 1977(긴급조치9), 1979(YH사건), 1980(김대중 내란예비음모 사건) 4차례에 걸쳐 약 3년간 투옥되었었고 1981년 결국 호주로 추방되는 일을 겪었다.

1984년 영등포산업선교회를 떠나 호주로 간 그는 2년간 그곳에 머물면서 그의 영등포산업선교의 사역을 정리하여 1986년 샌프란시스코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D.Min)을 받는데 그의 논문은 70년대 한국의 노동운동과 산업선교역사를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좋은 참고 자료로 쓰인다.

1986년 호주에서 귀국한 후 그는 구로동에 갈릴리교회를 시작하는 데 교회목회는 사실 그의 평생에 꿈꾸던 일이였다. 그는 2014년 조기은퇴를 할 때까지 28년 동안 갈릴리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했는데 교회개혁, 예배의 갱신, 선교공동체로의 교회 등 다양한 실험과 도전으로 한국교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의 갈릴리교회 사역 중 특별한 것은 우리나라 최초로 시작한 이주노동자 선교이며 20여 년간 830여명에게 세례를 베푼 기록이다. 그가 은퇴를 하면서 저술한 28년간의 목회보고서가 위대한 부르심이라는 책이다. 그의 갈릴리교회 목회에는 곽선희목사님의 큰 후원이 있었는데 그는 그 은혜를 잊을 수 없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한다. 갈릴리교회 목회를 하면서 그는 여러 사회참여 선교활동을 쉬지 않았다. 교회를 시작한 다음해(1987)엔 국민운동본부 대변인을 맡아 6월 민주항쟁을 이끌었고 문민정부시절에는 대통령위원회인 행정쇄신위원회, 노사관계개혁위원회, 세계화추진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KBS이사, 감사원의 부정방지대책위원회위원으로 참여했는데 모두가 비상임이었다. 이는 목사직과는 세상의 그 어떤 자리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그의 고집 때문이었다. 그는 평생 동안 그 같은 삶의 원칙만은 변치 않고 목사로서 끝까지 살아왔다.

문민정부의 여러 위원회에 참여하면서 그는 많은 의미있는 성과를 냈는데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제도도입, 행형제도 개선, 노동관계법개정, 이주노동자권리향상정책 등은 대표적인 그의 수고의 결과라 하겠다. 그 공을 인정받아 1998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다.

그의 시민운동에의 참여와 봉사도 그의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1999년 서경석 등과 경실련을 창립하는 일을 시작으로 바른 언론시민연합, 행정개혁 시민연합, 대북 인도적 NGO인 우리민족서로돕기 등에서 활동했으며 20162월에는 경실련 공동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시민운동의 1세대의 활동가이며 그 덕인지 평생 상복이 없던 그가 2014년 제4회 민세상(民世賞)을 받기도 했다

그는 또한 우리나라의 환경시민운동의 개척자 중의 한사람이기도하다.

1980년 호주체류시절 환경운동의 중요성에 눈을 뜬 그는 귀국한 후 권호경 등과 함께 공해문제연구소(기독교환경운동연대 전신)를 설립 본격적인 환경운동의 장을 여는데 앞장섰다. 그때의 실무자로 발탁한 사람이 최열이다. 그 후 공해문제 연구소를 이어받은 한국교회환경연구소 소장,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상임공동대표로 일했고 2009년부터는 김동흔, 오기출 등과 몽골의 사막화방지를 위한 나무심기에 열심하였고 그 공을 인정받아 2015년 몽골정부로부터 몽골 최고환경 지도자 훈장을 수여 받았다.

인명진은 매스미디어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1997년 우리나라 최초로 인터넷방송인 C3TV기독교인터넷방송을 곽선희목사님의 도움으로 설립하여 10여년간 운영하였고 지금의 GoodTV 기독교복음방송이 되었다. 그는 또한 직접 여러 방송과 일반신문매체를 통해 우리나라의 정치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활동을 해옴으로써 한국교회역사상 가장 일반 언론에 노출이 많은 목사로 기록되고 있다. 기독교 현직 목사인줄 잘 알고 있는 언론이 종교문제가 아닌 특히 정치문제에 대해 그에게 의견을 묻는 일은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는 일이며 과거나 또 어떤 성직자(다른 종교 포함)에게도 없는 특별한 일이다.

그의 이력 중에 특이한 것 하나는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2년간 역임한 일이다. 노동운동, 인권운동, 민주화 운동 등 진보적 운동을 평생 동안 해온 그가 그래서 용공좌경운동권이라는 딱지가 붙은 그가 평생 싸워온 군사독재정권의 후신인 한나라당 당직을 맡다니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로인해 그는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한 그의 변명은 예수님 말씀에 기독교인은 소금이고 소금은 어느 곳이든 필요한 곳에 쓰여야 한다는 것을 실천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나라당에 입당하지 않는 조건으로 그 직을 맡았으며 한나라당이 집권한 후에도 그 어떤 대가도 받지 않았고 자신은 그것이 또 하나의 그가 이 시대를 사는 목사로서 해야 할 목회였다고 말한다.

그는 2014년 말 28년의 갈릴리교회의 목회, 1972년 목사안수를 받은 지 43년 만에 공식은퇴를 했다. 정년보다 조금 이른 조기 은퇴이다. 너무 정신없이 눈코 뜰 새 없이 고단한 삶을 살아와서 이젠 좀 편안히 쉬고 더 늙기 전에 실컷 놀겠다는 생각으로 은퇴를 했는데 또 다른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한시도 쉬지 못하는 그가 만든 자업자득의 결과라고 말할 수도 있는 일인데 부산 일신기독병원 이사장으로 또 미얀마에 선교사를 보내고 병원을 세워 의료선교를 하는 일에 그리고 우리민족서로돕기 상임공동대표로 또한 경실련 공동대표로 그리고 더 자주 정치평론가(?)로 방송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일에 분주하다. 또 지난 2년 동안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오마이 갓이라는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고 더 특별하게는 불교방송BBS에서 일주일에 한번 스님과 대담하는 일로 또한 이 곳 저 곳에 강연으로 새로운 인생의 삶을 살고 있다. 최근에는 숭실대학교 제1호 석좌교수로 초빙된 것을 스스로 자랑하고 다니기도 한다. 그에게 은퇴는 있을 수 없는 모양이다. 그는 2015년 그의 모교인 장로회신학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그의 생애에 두 번 뜨거운 눈물을 흘렸는데 1995년 영등포노회장이 되었을 때와 그의 모교에서 명예신학박사학위(D.D)를 받았을 때라고 그는 말한다. 평생 동안 교회주류로부터 늘 설움을 받고 살았던 그가 당신이 옳았다고 인정을 받은 것이 그렇게도 기뻤던 모양이다. 김명룡 장신대총장은 그에게 명예학위를 주면서 이로써 장신대의 신학이 완성되었다고 의미있는 말을 했다.

그밖에 인명진은 총회 노회 교회연합기관(NCC, CCA)에서도 많은 일을 하였고 특별히 영등포노회와 독일 팔츠주교회와 가나 볼타노회의 3자 협력선교의 초석을 놓고 발전시키는 일에도 괄목할 만한 역할을 하였다. 결론적으로 그의 이력서는 아직도 공백이 필요하다, 앞으로 어떤 일을 더 기록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1972년 결혼한 아내 김옥란과 딸 사라, 아들 병민이 있고 슬하에 대원, 혜원, 다은 등 3명의 손자 손녀가 있는데 그는 늘 그들에게 빚진 마음으로 감사하고 미안해하며 살고 있다.